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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ㅣ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55세부터 헬로라이프>는 일본 대표 작가 무라카미 류가 신문 연재로 쓴 다섯 편의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연속 중편'이기 떄문에 하나의 큰 틀 안에서 각각의 작품이 서로 공명한다. 또한 주인공들 모두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고, 어떻게든 '재출발'하려고 애쓰는 중장년들인 데다 '보통 사람들'이다.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작가 무라카미 류는 '그들은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것인가. 그 물음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라고 말한다.
"정년퇴직 후에 찾아오는 어려움은 제각각이다. 경제적인 격차와 더불어 다양화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명의 주인공을 '유유자적형' '중간층' '빈곤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하지만 모든 부류에 공통되는 점도 있다. 그것은 그 인물들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어떠한 신뢰 관계를 구축해왔다는 것이다. '신뢰'라는 말과 개념을 이토록 깊이 의식하며 소설을 쓴 것도 처음이다."
이 책의 다섯 편의 중편 소설의 이름은 결혼상담소,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 캠핑카, 펫로스, 여행 도우미이다.
경제적 문제, 이혼, 실직?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후회를 남기는 거야
[결혼상담소]
TV 앞에만 있는 남편에게 ‘이혼하고 싶다’는 한마디를 던진 나카고메 시즈코. 남편의 대답은 “마음대로 해”라는 한마디였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황혼 이혼을 하게 된 그녀는 결혼상담소를 통해 재혼남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 찌든 여러 중년 남자를 만나면서 서서히 지쳐가는 시즈코. 그녀를 위로해주는 건 따뜻한 얼그레이 향기와 결혼상담소에서 친분이 쌓인 상담 담당자뿐인데…
"어차피 결혼 상대라고 해도 남자와 여자니까요. 이성적으로 결정한 대로 마음과 몸이 따르지 않는 법이죠. 헤어진 남편과는 전혀 다른 타입의 남성이라는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다만 그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하는 점이요."
"나카고메 씨가 비유로 든 배우 역시 정말 하고 싶은 배역이 평생 동안 그리 많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재능 있고 돈이 있어도 인생의 모든 일이라는 게 뜻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죠. 일이든 생활이든 타인이랄까, 상대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아무튼 타인은 로봇이 아니니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을 테고요. 다만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지를 생각하는 사람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른 인생이 시작되면 다른 사람이 된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굴이나 이름이나 성격이 바뀌는 게 아니라 곤충의 허물이 벗어지듯 무언가를 벗어던지고 다른 것이 새겨진다."
"돈이나 건강 등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불안투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다. 고독은 아니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면 맞은편 벤치에 앉은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자. 그리고 괜찮으면 홍차를 함께 마시지 않겠느냐고 청해보자. 나카고메 시즈코는 어서 빨리 얼그레이 향ㅇ로 가슴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선명하게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꿀지도 몰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해고당한 인도 시게오.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려 애쓰지만 현실은 차갑기만 하고 거리에서 노숙자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어느 날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그 앞에 중학교 시절 친구 후쿠다가 나타난다. 노숙자 행색의 후쿠다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시게오 역시 누군가를 도울 처지가 아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즐겨 마시던 미네랄워터를 건네는 것뿐. 죽음을 눈앞에 둔 후쿠다는 어머니께 전하는 마지막 편지와 반지를 시게오에게 전하고, 시게오는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러 나서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노숙자로 전락하는 경우의 공통점을 노트에 정리하기로 했다. 노숙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공통점을 염두에 두고 피하고자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먼저 일자리를 잃는다. 병이나 사고 등으로 건강을 잃는 경우도 많다. 생활이 곤궁해지면 대체로 부부 사이가 나빠지고, 급기야 가족을 잃고, 그리고 주거를 잃는다. 인도 시게오는 노트 맨 끝에 빨간 글씨로 써넣었다.
"일, 가족, 건강을 철저하게 지킬 것. 주거 사수. 빚은 절대 지지 않는다." "
"빈 차가 몇 대 달려오기에 손을 들었지만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 인도 시게오는 돈오 없고 허리도 안 좋은데 자신이 왜 후쿠다를 어머니에게 데려가려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분노였다. 지나쳐 가는 사람들에게 혐오에 가득 찬 시선을 받고, 택시 운전사들에게 무시당하자 노동지원센터의 층계참에서 자각한 분노가 점점 분명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다시금 타올랐다.
그러나 정부와 사회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택시 운전사, 노숙자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구체적인 어떤 것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는 그 오락실에서 생겨났고, 계단 층계참에서 술 취한 노숙자들이 앞을 가로막자 마치 점화된 것처럼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더니 밖으로 분출된 것이다.
그것은 무력감에 압도되어 뭔가 소중한 것을 방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분노였다. 분노를 통해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도 없다. 인도 시게오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얕잡아 보지 마라! 그렇게 외치는 대신 후쿠다의 몸을 부축하고 걸어 나갔다. 후쿠다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이제 영영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사에 있을 때는 몰랐어. 그 밑에 검버섯이 까맣게 피어 있다는 걸
[캠핑카]
중년의 나이에 가구회사에서 정년퇴임을 앞둔 토미히로 타로.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그는 모아둔 돈으로 캠핑카를 사서 부인과 함께 전국일주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바쁜 부인의 냉담한 반응과 이유 없는 불안 때문에 구매예약을 한 캠핑카를 취소한다. 재취업을 위해 그동안 인연을 맺은 거래처를 찾아다니지만 그의 퇴사 소식을 들은 담당자들은 난색을 보일 뿐 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타로의 불안감은 점점 심해지고 급기야 병원을 찾을 상황에 처하는데…
토미히로는 나날이 불안정한 사회에서 경험한 적 없는 정년이라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가슴 설에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고마노의 생각에 영향을 받는다.
"좋은 재취업 자리라도 있으면 모를까, 체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저금도 나날이 줄어들기만 하지. 중장년층 자살이 많은 것도 당연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앞으로 좋은 일 같은 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도 내게는 이런 좋은 일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희망이잖아. 뭔가 희망이 필요한 거야."
"토미히로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는 '세일즈맨으로 다시 한 번 현장에서 뛰고 싶다. 어떤 현장이어도 상관없다.'라고 적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다른 사람이 포기한 순간부터 도전을 시작할 수 있다'라고 썼다. '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캠핑카로 아내와 여행하는 것.'이라고 쓰려고 했지만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단순히 '다양한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의식 밑바닥에서 더 중대한 물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이제까지 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라는 물음이었다. 그 답을 찾지 않고서는 '자기소개서'를 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부부니까? 제겐 가족보다 보비의 죽음이 더 중요해요!
[펫로스]
평범한 가정주부 다카마키 요시코에게 시바견 보비는 인생 그 자체다. 무뚝뚝한 남편보다 보비에게 더 애정을 쏟는 그녀는 친구들 역시 애견모임을 통해 사귀게 된다. 애견모임에서 보이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 하지만 나이 든 보비가 병에 걸리고 그녀 역시 보비 때문에 하루하루를 눈물 속에 지새운다. 애견모임도 나가지 않고 남편의 위로도 소용없이 병든 보비만을 끌어안고 지내는 그녀에게 보비의 죽음이 닥치는데…
요시다가 다카마키에게 건네는 반려견과 신뢰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훈련이라는 건 명령을 따르게 만드는 것인데,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요컨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주인에게 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집이나 학교에서 누가 부르면 대답을 해라, 부르면 가라고 배우지요. 그러니까 누가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얘기죠. 하지만 개는 부르는데 오지 않는다고 막대기로 때리거나 하면 더 오지 않을 거예요. 이름이 불리고, 이리 오라는 말을 듣고, 주인에게 가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으니까 가는 것, 나는 그런 게 진정한 신뢰가 아닐까 생각해요."
운반한다, 운반한다, 운반한다, 내 인생은 그것뿐이었어
[여행 도우미]
햇차를 좋아하는 시모후사 겐이치는 운송회사를 다니다 그만두면서 아내와 헤어지고 현재 하청업체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는 중이다. 역 근처 헌책방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걸 즐기는 그 앞에 비슷한 취향의 소설을 즐기는 아름다운 유부녀 호리키 아야코가 나타난다. 그녀에 대한 연모의 감정 속에 조금씩 인연을 쌓아나가던 그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병든 남편 곁을 떠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연모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위해 여행 도우미까지 고민하는 시모후사 겐이치는 또다시 운전대를 잡고 떠나는데…
"물건이든 사람이든 이동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창고에 아무리 구두나 옷이 잔뜩 쌓여 있어도 소용없다. 운반되어 가게에 진열되어야만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내 일이다. 운반하는 일. 아주 가치 있는 일이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왠지 모르게 와구에 살던 시절 해녀 오두막집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사람한테만 할 수 있다. 제멋대로 호리키리 아야코를 희망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음을 자각했다. 그 사실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 와구의 해녀 오두막집에서 해녀들의 열기에 휩쓸린 것처럼 어느 날 폭발적으로 말문이 터졌지만, 본질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았던가. 할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해녀 오두막집에 혼자 멍하지 앉아서 모닥불을 쬐며 손을 덥히던 어린애가 진짜 내가 아닐까?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게 된 것도 당연하고, 술집 여자들이 놀이 상대로 나를 선택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상대였다. 단순히 시간을 떄우기 위한, 심심풀이 땅콩 같은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