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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 - 애도의 방식
안보윤 외 지음 / 북다 / 2023년 9월
평점 :
'문학적 사유'를 발견하게 하는, 가산 이효석 작가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명실상부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이효석문학상의 수상작품집이 제24회째를 맞이하여 출간되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은 2022년 6월부터 2023년 5월까지 기성 문예지 및 웹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김병운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 김인숙 '자작나무 숲', 신주희 '작은 방주들', 안보윤 '애도의 방식', 지혜 '북명 너머에서'가 최종심에 올랐고,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안보윤의 '애도의 방식'이을 제24회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대상 수상작인 안보윤 작가의 '애도의 방식'은 학교폭력 가해자의 사망 이후 남겨진 피해자와 그 유족의 각각의 애도의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애도의 방식'은 주인공 동주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승규의 죽음 이후 승규 어머니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애도의 방식'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던 동주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승규의 죽음에 관한 소문의 당사자가 되어 경험한 심리와 아들 승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승규의 엄마의 심리가 부딪히며 기존의 학교 폭력 피해자의 서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예상을 뒤엎는 결말로 이어지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여자는 승규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끝까지 모른 채 살 것이다. 승규가 마지막의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는지 모른 채 섬에서 시금치들을 돌볼 것이다. 고요히 평화롭게 늙어 갈 것이다. 그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라는 주인공 동주의 독백을 통해 학교 폭력의 가해자를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소란한 곳에 방치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한 곳에 시선을 두면 안 된다. 누구에게도 동조하지 않고 피곤한 기색으로, 두 팔을 원숭이처럼 늘어뜨린 채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는 드물다. 누가 시비를 걸더라도 그 자세 그대로 꾸뻑 사과하면 그만이다. 소란한 곳에 소란스럽지 않은 인간으로 멈춰 있을 때 나는 가장 안전하다."
"여자가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구운 파인애플을 도막도막 잘라놓지 않고 먹는다. 노른자를 터뜨려 끼얹은 고깃덩어리를 죄다 으깨놓고 먹지 않는다. 여자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비린 것을 물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동주야, 여자는 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나는 못 들은 척 움직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접시를 치우고 덜걱대며 테이블을 닦는다. 간이 싱크대에서 찾잔을 씻다가 커피잔을 하나 깬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한다. 알 리다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 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소란은 소문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소문을 불신하고 누군가는 소문을 맹신했다. 소문 속에서 나는 승규의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하고 승규를 등 뒤에서 힘껏 떼밀기도 했다. 학교 복도나 급식실에서 했다면 대수롭지 않을 행동들이었으나 난간이 없는 옥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당했으니 동주 개도 한 번쯤은 암만 억울해도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누군가는 동조하고 누군가는 비난했다. 매일매일이 소란했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2023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대상 수상 작가 안보윤의 자선작으로 실린 '너머의 세계'는 학교 안에서 교사들의 교권이 무너지고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존엄성을 위협받는 현실의 세계를 깊이 반영한 작품으로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엔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수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작은 현관이 붙은 교실을 떠올릴 때마다 구토와 어지럼증이 솟는다는 걸,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진다는 걸, 교탁 앞에 서면 시야가 급격히 졸아들면서 머릿속에 암흑이 찾아온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수가 아무리 애를 써도 들키는 것이 있었다."
"연수는 소란한 복도를 뒤로한 채 걸었다. 걸을수록 복도는 더 길고 어두워졌다. 계단을 내려가 중앙 현관에 있는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 운동장으로 나가는 장면을 연수는 계속 상상하며 걸었다. 그것은 적어도 복고 창 너머 크고 단단한 돌덩이를 상상하는 일보단 나았다.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 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
김병운 작가의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적 소수자인 '진무 삼촌'의 생존 사실을 알고서 그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 '나'와 친구 '장희'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세월은 우리에 게 어울려'는 퀴어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의 혐오가 만들어내는 편견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을 성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평등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는 퀴어의 세대를 뛰어넘는 이야기로 진정한 소통의 과정을 표현하여 인상적이다.
"이영서 씨는 말했다.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오늘 장희 군한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삼촌은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삼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장희가 왜 P를 떠올렸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다 P를 잃었으니까. 중죄를 지은 듯이 자책하고 선처를 바라듯이 관용을 구걸하다 P를 빼앗겼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나는 어떻게 되었나? 배제되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나는 어떻게 되었나? 박탈당했다.
그 시절 장희는 도대체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느냐며 나를 한심해했지만, 사실 나는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내가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믿으라면 믿는 그런 충직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당신들 못지않게, 아니 당신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모범적이며 무해하므로 내게도 자격이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기꺼이 참고 견뎠던 것이다. 오직 내가 원했던 단 한 자리. P의 곁에 있기 위해서. P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서."
이밖에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3에서 김인숙 작가의 작품 '자작나무 숲'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자작나무 숲'은 어느 것도 자신의 혈족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 '쓰레기 호더' 할머니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할머니의 집,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애증 섞인 시선과 신랄한 서술을 만나볼 수 있다. '자작나무 숲'의 주인공은 죽은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의 집을 상속받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더욱 열심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어린 나이의 아버지의 죽음이 존재했던 집에서 모든 기억을 안고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다. '자작나무 숲'은 자작자작 타는 자작나무의 소리처럼 애타는 마음들을 섬세하게 이야기하는 김인숙 작가의 글이 인상적이다.
"할머니와 함께 뒷산 아래에 죽은 동물을 묻어줄 때부터 알았다. 왼발 오른발 하며 꽝꽝 땅을 다질 때부터 알았다. 얘들은 이제 열심히 살아 있지 않아도 되지. 얘들은 이제 피 안 흘려도 되지. 얘들은 이제 꿈을 안 꿔도 되지."
"숲으로 가야 할 것이다. 할머니를 버리러. 어쩌면 아빠도 버리러. 가다가 자작나무 숲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한 껍질 한 껍질 벗으면서도 맨몸이 되지 않는 나무들의 숲. 환한 나무들의 숲. 그런 숲에 이르면 나는 마침내 물을지도 모른다. 뭐가 그렇게 탔어, 뭐가 그렇게 애타게 자작자작 힘들었어, 할머니.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으므로. 그러나, 다시 궁금해진다. 죽음 사람은 과연 대답할 수 없는 것일까."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