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 이미령의 위로하는 문학
이미령 지음 / 샘터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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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는 수년째 'YTN지식카페 라디오 북클럽'에서 하루에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 외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 살고 있는 저자 이미령의 위로하는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에세이이다. 이미령은 팔만대장경을 번역하고 불교의 세계를 강의와 글로써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인물이며 책을 읽는 시간은 세상의 작고 여린 것들을 위로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책 속 세상에는 영웅도 악한도 모두가 저마다 자기 사연을 늘어놓습니다. 거인처럼 여겨졌던 이들에게도 탄식이 쏟아지고, 위선으로 똘똘 뭉친 악인에게도 수줍음이 있으며, 세상에서가장 선량한 자에게도 교활한 눈빛이 숨어 있고, 명석한 철인에게도 생명에 대한 무지가 서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 속삭임과 흐느낌을 만나면서 책은 내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줍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굳건하게 품던 생각들에 틈이 생기고, 이전에는 보지 못한 면을 보게 됩니다. 책이 내게 열어주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탄식합니다.

'세상은 얼마나 작고 여린 것들로 가득 차 있는가!' "


이 책은 함민복의 '눈물을 외 짠가',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로실드의 바이올린', 윤태호의 '미생',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 광대', 줌파 라히리의 '일시적인 문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윤홍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이언 매큐언의 '속죄', 김주영의 '도둑견습',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고은규의 '알바 패밀리', 페터 빅셀의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황소',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랑',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배리 하인즈의 '케스-매와 소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 류수홍의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허준의 '잔등', 존 버거 장 모르의 '행운아', 루쉰의 '고향',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푸른 알약', 전영택의 '화수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문학작품들을 저자만의 책을 읽는 깊이 있는 시선으로 소개한다.


이 책에서 파크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라는 작품을 '익명의 낙원 잃고 휘청거린 하루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귀가 인상적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카락도 빳빳하게 섰다. 비둘기의 눈이 미처 다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는 후다닥 방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부들부들 떨며 비틀비틀 침대까지 가, 마구 방망이질 쳐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털푸덕 주저앉았다. 이마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목덜미와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둘기>는 조나단에게 벌어진 이날 하루의 소동과 지독한 혼란을 지겨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냅니다. 한 인간이 자신이 지켜온 일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길 때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연쇄작용을 일으키는지가 섬뜩할 정도입니다.(...)

현대인들은 익명성 속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하지요. 하지만 익명성 속에서 지켜지는 자신만의 왕국은 이처럼 덧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허수아비보다 못한 현대인의 자존감, 그 무게가 황당할 정도로 가벼워서 오히려 현대인들은 휘청거리며 사는 모양입니다."


저자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을 '갑작스레 닥친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주제의 글로 풀어낸다. 우리의 현실은 온통 뒤틀리고 꽉 막힌 난제로 가득한 반명 인간의 힘은 놀랍고 위대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펼친 이 세계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카뮈의 <페스트>는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을 대, 자기 책임도 아닌 일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에 말려들 때 펼쳐지는 사람들의 혼돈과 방황, 저마다의 극복 의지를 세밀하게 담고 있다. 특히 전염병으로 폐쇄된 도시 안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와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몸부림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메스르 사태를 겪어보았고, 해마다 쉬지 않고 발생하는 조류독감과 같은 가축 전염병오 경험했지만 메르스로 인해 일상이 정지당하고 격리된 사람들을 둘러싼 반응이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그들이 갇히게 된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안전지대 안팠의 모두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죄인'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을 보여준다. 저자는 오해하고 왜곡할 때 인간은 재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재난이 반복되었을 때 또다시 절규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이런 재난에서 자유롭지도 무관하지도 않다는 것을 카뮈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다.


' "영웅 놀음은 집어치우고 전반적인 해방을 기다립시다. 나는 그 이상은 더 나가지 않겠어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문제입니다. ......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내가 전율하는 부분은,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극복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불행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딱 저마다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는데, 이때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현실을 추상적으로 대하려는 생각이라고 카뮈는 지적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어떤 의미를 자꾸만 덧붙여이고 모호한 관념으로 대할 때 인간은 그런 불행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행이 반복될 때 또다시 절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이 부분은 파늘루 신부가 어린아이의 죽음을 마주할 때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페스트에 걸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구원해달라고, 그래도 신은 사랑이시라며 기도하는 신부를 향해 의사는 말합니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아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구원'이라는 사탕발림을 거부하며, 지금은 죽음과 불행을 직시하고 그것들과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이 의사의 생각입니다. 이런 어린 양들의 저항에 신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실존을 온갖 메타포와 이론으로 치장하고서 저 멀리 있는 구원만을 들먹이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전생을 들먹이는 종교인들로서는 이런 '어린 양'들의 저항, '죄 많은 범부'의 반발에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의사는 자신의 이 과격한 발언까지도 사과합니다. 그런 종교적 자세 또한 불행한 현실에 대처하고 싸우려는 하나의 방식일 테니까요. 이렇게 한계에 봉착한 인간은 저마다의 지혜를 짜내서 힘을 합해야 한다고 카뮈는 말합니다."


저자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통하여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을 향한 어느 필경사의 외침'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여 흥미롭다. 


"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이 말은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문장이 됩니다. 원 문장은 "I would prefer not to" 입니다. 이 문장은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

하지만 "싫습니다"라는 말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에는 뭔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집니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건 아니면서도 결국은 하지 않겠다는 쪽이니 당신이 그건 이해해줘야 한다는, 사뭇 인간적인 배려를 요구하는 듯한 거절이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세상.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세상. 인정이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하오는 세상. 능률과 성과가 우선이어서 지체되는 것이 재빨리 폐기 처분해야 하는 세상. 그 속에서 버티려면 감정도 의지도 죽여야 하는 세상. 이미 자신의 선택이랄 게 없는, 남에 의해 정해져 있는 세상. 바틀비의 삶은 이런 세상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저자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쪼그라든 세상에서 만난 운명의 지배자'라는 주제로 쓴 글이 눈길을 끌었다.


"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은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이 말 하나에 조르바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무엇'에 대해 알아보느라고 한 번도 '무엇'인 적이 없었습니다. 아, 정말 그렇습니다. 불교신자는 붓다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하느라 일생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건 조르바 스타일이 아닙니다. 조르바는 붓다로 살아버립니다. 붓다에 대해 알아보는 게 아니라 붓다고 사는 것이지요. 진리에 대해 알아보는 게 아니라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니 그것을 '논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원리로, 조르바는 일할 때면 일 그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살아야 할 때 제대로 살지 못하고, 늘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은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저울을 품에 넣고 다니는 이들은 늘 생명의 무게를 달며 값을 따집니다. 하지만 조르바에게 생명은 처음이자 끝입니다."


저자는 '존 버거, 장 모르'의 '행운아'를 통해 '불행이 넘쳐나는 시대에 '행운아'가 되는 법'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한다. 불행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생각하며 사는 시골의사 존 사샬은 그의 직업에서 인간이 행운아가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다.


" "진찰을 잘하는 의사는 드문데, 이는 그 의사에게 의학지식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관련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실들-단순히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 역사적, 환경적인 것까지-을 고려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시골의사 존 사샬은 이처럼 환자를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 역시 총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환자의 질병과 환자의 인간 전체를 분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잘 살필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는 상식이라는 늪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늘 사색하고, 시험해보고, 비교해보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매일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들 중에 그 어떤 환자도 똑같은 증상을 가진 이는 없고, 똑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도 없습니다. 이런 가운에 존 사샬은 자신이 알고 잇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그동안 상식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지는 늘 의심하고 사색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의 원고는 저자가 <법보신문>에 연재한 글들이며, 프롤로그에 실은 글은 국방부에서 펴낸 <마음의 양식>에 담은 글을 저자가 다듬은 것이다. 저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책 읽기는 그 빈 자리에 책 속의 주인공을 맞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내 속에 들어와 있던 작품 속 주인공을 내보낸다. 저자는 본래의 나로 돌아와서 책들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었고, 내게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 이것이 책 읽기의 본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


"문학은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동경하게 하고, 질투하게 하고, 두렵게 만듭니다. 각박한 일상을 살아가느라 딱딱하게 굳은 감성을 간질이고, 엄숙한 철학을 논하느라 지쳐버린 이성을 부드럽게 녹이빈다. 세상의 구원을 저 혼자 장악한 듯 위세를 떨치는 종교와 세력의 덧없음을 깨닫지 못한 채 권세를 부리는 권력을 향해 혀를 내밀어 조롱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문학에서는 참 다양한 인간을 만날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뻐기는 사람, 소심한 사람, 비열한 사람, 허황된 사람, 저속한 사람, 자기 꾀에 넘어가는 사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는 일이빈다. 그들이 웃고 우는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불러낸 이들의 심정을 좇다 보면 어느새 삶의 위안을 얻은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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