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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덴탈 유니버스 - 우리가 몰랐던, 삶을 움직이는 모든 순간의 우주
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 / 다산초당 / 201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엑시덴탈 유니버스>은 MIT 최초로 과학과 인문학 교수에 동시 임명된 앨런 라이트먼이 들려주는 가장 아름답고 인간적인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소설가이자 이론물리학자이다. 그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다양한 테마의 에세이와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해 현재 여섯 권의 소설, 두 편의 수실집, 한 편의 시집, 그리고 과학 관련 서적을 여러 권 펴냈다. 책 <엑시덴탈 유니버스>는 2011년 시드니 어워드 '베스트 에세이'를 수상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서 교수를 맡고 있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에서는 과학과 인문학에서 이중으로 교수직을 맡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책의 1장 '우연의 우주'에서는 다중의 우주, 다중의 시공간 연속체, 3차원 이상의 우주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단 하나의 연속체, 단 하나의 '우주'만 존재한다고 해도 하나의 우주 안에도 일부는 보이고 일부는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 우주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우주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분명 우주에 관한 서로 다른 수많은 관점이 존재한다. <엑시덴탈 유니버스>는 그 중 일곱 가지 관점을 탐험한다. 이 탐험을 통해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화,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덧없는 본질 사이에서 빚어지는 충돌, 인간의 존재가 그저 하나의 우연에 불과할 가능성, 현대 기술이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도록 단절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거대한 공간 속에 서 있는 작은 존재로서, 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우주가 우연의 결과물이며, 계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우주를 관찰할 수 있는 방법도, 그 존재를 입증할 방법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관찰한 세상과 머릿속에서 추론한 세상을 설명하려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라고? 신학자들은 입증되지 않은 것을 믿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사실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하는 다중우주이론은 과학의 오랜 전통과 심각하게 충돌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중우주를 예측한 이론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 검증 가능한 다른 예측을 함께 내놓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수많은 다른 우주는 계속 추측의 영역에 머물 것이다."
(/ '1장 우연의 우주' 중에서)
저자는 인간이 어째서 자연에 널리 퍼져 있는 대칭에 매력을 느끼며, 왜 그런 대칭을 흉내 내서 무언가를 만드는지 묻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자연을 따로 구분 짓는 실수일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연과 똑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뇌 역시 자연에서 발달해 나왔다.
"인간의 뇌는 수억 년에 걸쳐 햇빛, 소리, 촉감을 통해 몸 주변의 세상과 연결되어 감각적으로 반응하며 진화해왔다. 그리고 우리 뇌의 구조는 꽃, 해파리, 힉스 입자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시행착오, 똑같은 에너지 원리, 똑같은 순수수학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간의 미적 특징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미적 특징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왜 인간이 자연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름다움, 대칭, 최소한의 원리는 우리가 우주에 포함시켜놓고 그 완벽함에 감탄하는 속성들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원자의 특정 배열이 우리의 정신을 만들어내듯이 말이다. 우리는 바깥에서 안을 구경하는 외부 관찰자가 아니다. 우리 역시 그 안에 들어가 있다."
(/ '2장 대칭적 우주' 중에서)
저자는 과학이 지식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아니며 시험관과 방정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흥미롭고 중요한 질문이 존재한다는 콜린스, 허친슨, 깅거리치의 주장에도 동의한다고 말한다. 예술이라는 광대한 분야는 분명 과학으로는 분석할 수 없는 내적 경험을 다루고 있다. 역사와 철학 같은 인문학은 만장일치의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은 해답보다는 질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우리가 물리적 증거 없이, 그리고 심지어 가끔씩은 증명할 방법조차 없이 오로지 신념에 근거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어떤 특정 소설의 결말 부분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꼬집어 말할 수 ㅇ벗다. 우리가 대체 어떤 상황에서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는지도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둑질하는 거이 과연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증명할 수 없고, 심지어는 '옮음'과 '그름'의 정의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심지어는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도 증명할 수 없다.(...) 미학, 도덕률, 철학과 관련된 질문들은 예술과 인문학을 위한 질문이며,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전통 종교의 일부 관심사와 맥을 같이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신념, 그리고 초월에 대한 열정은 인류가 만들어낸 수많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창작물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가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점은 과학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20세기 이후 물리학자, 생물학자, 화학자들은 수많은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어냈다. 과학이나 종교 모두 좋은 일에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일에 쓰일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인간은 과학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키우고 소통의 속도를 높였듯이,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학교와 병원을 짓고 시와 음악을 만들고 아름다운 사원들을 건축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신념이란 그저 신의 존재를 믿거나 과학적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개념이다. 신념이란 때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겠다는 의지다. 신념이란 자신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신념이란 때로는 고요함을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열정의 충만의 물결에 올라탈 줄도 아는 능력이다. 이것이 곧 예술적 충동이자 상상력의 나래이며, 영롱하게 반짝이는 이 이상한 세상에 온전히 참여하는 일이다."
"내 안에는 종교와 과학 모두를 위한 공간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우주와 물리적 우주 모두를 위한 공간도 존재한다. 이 각각의 우주는 자기만의 힘을 지니고 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한 목사가 최근에 내게 말하기를, 과학과 종교의 공통분모는 경이감이라고 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 '3장 영적 우주' 중에서)
저자는 자연에서 보이는 모든 증거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계속 불멸을 갈구하고 분명 무언가 영원불변의 존재가 있으리라 열렬히 믿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안고 있는 심오한 모순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증거는 너무 확실하다. 여름이면 하루살이들이 태어난 지 24시간 만에 수십억 마리씩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수컷 개미들은 2주 만에 죽는다. 숲은 산불로 사라졌다가도 다시 생겨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사라지고 만다. ……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화살’이라고도 한다. 이 법칙에 따르면, 우리 인간들이 영원을 갈구하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주는 가차 없이 자신을 마모시키고 허물며 스스로를 최대의 무질서 상태로 몰아간다. 이것은 확률의 문제다."
"우리의 바람과 희망에도 결국 필사의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면, 혹시 그 덧없는 운명만이 품을 수 있는 나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존재하지는 않을까? 우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삶을 극복해보겠다고 몸부림치고 목 놓아 울지만, 그런 덧없음 속에서 무언가 웅장함을 찾을 수는 없을까? 덧없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존재의 소중함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 '5장 덧없는 우주' 중에서)
저자는 자연법칙은 합리성과 이성의 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자연법칙에서조차 인간은 서로 모순되는 양면적인 욕망으로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질서를 좋아하지만,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우리는 예측 가능한 것을 좋아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도 좋아한다. 우리는 때때로 옥에 티 같은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
"나는 합리적 법칙이 물리적 우주를 완전히 지배한다고 믿으며 육체와 정신 또한 순수한 물리적 존재라고 믿는다. 더 나아가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만약 누군가가 두드리는 대로만 소리를 내는 피아노 건반처럼 이미 결정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나 역시 그런 생각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모든 해답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에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영감과 자극을 받는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부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가장자리가 늘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 가장자리 너머가 바로 기이함,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생명이 자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 '6장 법칙의 우주' 중에서)
저자는 지금부터 100년 뒤엔 우리가 부분적으로는 인간, 부분적으로는 기계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고 말한다. 전자 귀를 달게 될지도 모르고 눈에는 X선과 감마선을 볼 수 있는 특수한 렌즈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22세기가 되면 휴대폰에서 레이저 홀로그램으로 서신을 교환할 수 있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3D 영상을 보며 대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뇌 속에 직접 컴퓨터 칩을 이식해 인터넷의 거대한 정보에 곧바로 접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사람들이 스마트폰과 화상통신에 적응하는 것처럼 우리 대부분은 이런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해준 과학과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자연,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커다란 모순으로 느껴진다. 요즘에는 세상과 접촉할 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휴대폰, 아이패드, 채팅방, 향정신성 약물 등 다양한 인공 장치를 통해 중재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중에서 양자 세계의 파동-입자 이중성에 대해 알고 있거나 거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극소수이겠지만 사실 양자역학은 트랜지스터, 컴퓨터 칩, 그리고 이런 장치에 의존하는 현대의 모든 디지털 기술을 뒷받침하는 과학이다. 그와 유사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방송 전파, 전화국, 무선통신중계기, 무선 모뎀 등을 통한 정보의 송신과 수신은 모두 맥스웰과 헤르츠가 발견한 보이지 않는 전자기파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런 기술에 동반되는 심리적 변화는 좀 더 미묘하게 나타나며, 어쩌면 이것이 더욱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육체와 분리된 기계와 장치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일에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얼마 전에 비행기에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앞에 있던 한 젊은 여성이 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머리도 빗고 립스틱도 바르고 뺨에 분도 바르고. 이 모두가 수천 년 동안 계속 되어온 여성의 의식이다. 하지만 그 여성이 사용한 ‘거울’은 진짜 거울이 아니라 자가 촬영 방식으로 설정해놓은 스마트폰이었다. 여성은 디지털화된 자신의 이미지에 반응하고 있었다."
(/ '7장 분리된 우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