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교과서 니체 -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플라톤아카데미 인생교과서 시리즈 7
이진우.백승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인생교과서 니체>는 철학자 니체라는 인물을 오랜 시간 연구해온 저자인 이진우, 백승영 저자가 니체에게 묻고 싶은 다양한 질문들에 답을 한 책이다. 니체는 '철학은 건강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지혜를 찾는 실존적 행위다. 여기에 철학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철학은 곧 삶에 봉사하는 삶의 기술이자 삶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인생교과서 니체>는 위대한 건강을 갖춘 인간들의 위대한 미래, 철학적 의사이자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니체가 심혈을 기울여 제시했던 청사진의 구체적인 모습을 탐색해볼 수 있는 책이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래의 조산아인 우리.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목적을 위해 하나의 새로운 수단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건강을, 이전의 어떤 건강보다도 더 강하고 더 능란하고 더 질기고 더 대담하며 더 유쾌한 건강을 필요로 한다.(...) 즉 위대한 건강을 - 이는 사람들이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획득하고 또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삶을 위한 삶'과 '삶을 거스르는 삶'이다. '삶을 위한 삶'은 진정한 삶을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내일에서 죽음 이후의 내세로 연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거스르는 삶'은 '본능에 대적하는 삶'이다. 우리는 본능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없다. 본능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모습이 결정된다. 본능을 인정하고 가꾸지 않으면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다.


진정한 삶은 충동, 욕망, 쾌락, 본능의 부정과 포기가 아니다. 진정한 삶을 오히려 이제까지 부정되고 배척되었던 것, 즉 우리의 몸과 쾌락, 그리고 본능과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의 유혹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만의 이상을 만들어갈 때 가능한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결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본능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획득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니체는 "관점적 평가와 가상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한, 삶이라는 것은 전혀 존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은 욕망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그러나 아무런 목적 없이 투쟁한다면, 우리 인생은 천박한 쾌락주의나 금욕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데카당스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욕망과의 투쟁은 바로 삶의 목적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상’을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 p.26)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가에 세우라!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내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지배와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와 정복자가 되라!"


니체는 <즐거운 학교>의 한 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삶과 죽음은 결코 대립적이지 않다. 삶도 죽음의 한 형식일 수 있다면, 죽음도 독특한 방식으로 삶에 기여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모든 철학적 성창은 실제로 니체의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체는 죽음을 삶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니체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적 거짓말은 삶을 파괴하는 허위의식이라고 단언한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는 결코 세계의 바깥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세계', 즉 현세를 살아가는 구체적 존재다. 우리가 사고 있는 이 세계의 앞에도 그리고 뒤에도 결코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삶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그것도 매우 희귀한 형태다."


니체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버렸다는 인식에서 신으로 대변되는 영원한 생명을 부정한다.니체에게 "무신론은 본능적으로 자명한 사실"이다. 신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에, 니체가 신의 죽음을 데 그토록 철저하게 선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는 결코 제때에 죽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내일에서 죽음 이후의 내세로 연기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진실하게 살라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단순히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삶을 완성하는 ‘자유로운 죽음’을 원한다면 이제 우리는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망상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죽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죽음이 우리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
(/ p.83)


'나는 누구인가', 니체는 이 물음 자체를 해체시켜버린다. 진정한 나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알 수도 없다. 이제까지 나에게 덧씌워진 가상의 허울을 던져버리고 찾고자 하는 진정한 나는 또 다른 허상에 불과하다고 폭로한다. 니체는 '영혼', '정신' 또는 '나'로 불리는 인간의 본질을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위 말하는 진정한 자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를 끊임없이 해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들어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자신의 존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아모르파티를 '전체 세계의 필연성'에 대한 사랑이자 그 필연적 세계를 담보해내고 관계적 질서를 '같이 만들어가는' 우리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제시한다. 아모르파티는 독자적 개체로서의 자신에게만 오로지 집중하고 자신의 개별적 삶만을 독립적으로 구성해가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아모르파티의 진정한 의미는 나와 세계 전체의 운명을 같이 짊어지는 사랑이라는 데 놓여 있다. 그것이 바로 나와 세계에 대한 운명적 사랑, 나를 포함한 이 세계 전체가 필연이고 거대한 관계망이라는 점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


"아모르파티라는 사랑. 그것은 이 세계 전체의 관계성과 필연성에 대한 사랑이기에, 그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필연성과 관계성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즉 세계의 모든 것을,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하다거나 우연이라거나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고, 모두가 다 거기 그렇게 있어 야만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긍정하는 사랑 말이다. 그래서 아모르파티는 곧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인정하는 사랑이자 긍정하는 사랑이다. 니체가 ‘디오니소스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기도 하는 이런 사랑, 인정과 긍정의 사랑, 니체는 우리에게 이 세상 속 모든 것에 대해 이런 사랑을 하기를 요청한다."
(/ p.128)


권력은 삶의 전제조건이며 동시에 문화의 토대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명령하고 압도하려면, 간단히 말해 다른 사람에 대해 권력을 가지려면 그 사람이 인정하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진정한 권력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천재의 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천재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작품에 쏟아부은 힘 떄문이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사용한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 권력은 사악한 것인가?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는 삶의 전제조건이며 권력관계는 서로를 극복하고자 하는 어떤 것의 징후에 불과하며 진정한 권력은 항상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고 답한다.

"왜 우리는 권력을 추구하는가? 니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권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자기극복이 바로 권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해석해야 한다.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 이런 질문들이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권력을 부정할 수 없다. 권력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 p.192)


모든 도덕과 윤리는 한결같이 욕망의 통제와 절제를 요구한다. 왜 우리는 삶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욕망과 충동에 대해 이처럼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니체에 의하면 욕망과 충동의 인정이 그에 대한 부정과 억압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가 욕망을 이성적으로 통제한다고 말하지만 이 경우에도 실은 이성이 다른 욕망, 즉 욕망을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욕망을 절제하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한가함과 무위는 정신적 여유를 전제한다. 그것은 성찰과 명상의 시간을 의미한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성찰의 힘, 명상의 힘, 생각의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반성하고 판단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의 중요성은 자주 간과된다. 현대세계에 그 현상은 가속화된다. 분주함과 바쁨이 이제는 노동의 덕목을 넘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니체가 진정 바라는 것은 우리가 노동을 놀이고 삼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개인과 사회의 결단이다.

"‘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될 뿐 전혀 새로운 것은 없다면’이라고 물어보는 이 사유실험은 니체 철학에서 삶 자체의 건강성 확보를 위해 개인적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 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바쁜 노동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한가한 놀이자로 살 것인지를 결단하는 데도 유용하다. 내가 종사하는 이 일이 과연 영원히 반복해도 좋을 정도의 것이어서, 그 악마의 말이 축복처럼 들릴 것인가? 아니면 단 한 번만의 반복이라도 이미 저주 그 자체일 것인가? 이를 생각해보라는 권유도 되기 때문이다."
(/ pp.214~215)


"모든 신은 죽었다." 니체가 선언하는 '신의 죽음'은 신앙인들의 무게중심을 신에게서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성찰이며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성을 주목하자는 권유이자 동시에 인간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게 만드는 신 개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종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자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성의 회복을 위한 철학적 시도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신이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적절한 '거리 두기'가 진정한 웃음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가 학생일 때 겪은 일화는 어떻게 생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암시한다. 니체의 유머는 물론 엄숙하고 고루한 교사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 니체는 벌을 받게 되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니체의 철학적 태도로 발전되었다. 진지한 삶을 살아내려면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신의 죽음 이래 우리의 삶에는 결코 주어진 목적과 의미가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이 없기에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목적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에서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희극이다. 이 희비극을 견뎌내려면 우리는 웃음을 필요로 한다.


"지루한 일을 유머를 통해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모든 발언들에 농담의 옷을 입히는 쪽지를 썼다."

"우리의 삶에는 이성뿐만 아니라 비이성적 충동도 필요하고, 진리뿐만 아니라 허구적 환상도 필요하다.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을 웃으면서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삶을 긍정하자. 내일이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웃자."
(/ p.265)


병든 개인과 건강한 개인은 무엇으로 측정되는가? 니체에 의하면 그 기준은 노예성과 주인성이다. 주인성은 자기지배의 힘, 자신에 대한 책임의식 및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자유에 대한 열망과 실천,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 자신의 삶의 계율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주권성, 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의지, 진정한 적이 곧 벗이라는 점에 대한 통찰,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 전체가 거대한 관계체라는 점에 대한 인식, 그 관계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정 및 긍정 등을 주요 요소로 한다. 반명 노예성은 자기지배력의 부재, 자유 대신 복종, 자기챔임에의 의지나 의식 대신 자신의 외부에 대한 책임회피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시선, 주권성 대신 타율성, 주인적 존재에 대한 미움과 원한의식과 보복심리, 삶의 향상에의 의지 대신 평균성에 안주하기, 무리를 짓고 무리 속에서 무리의 삶의 원칙을 추종하면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무리본능, 자신에 대한 사랑과 존중 대신 피해의식과 열등감 등을 주요 요소로 한다. 주인성의 노예성에 대한 지속적인 승리, 그 승리는 곧 건강성의 상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