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연습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김혜진 옮김 / 더난출판사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있는 그대로의 연습>은 <생각 버리기 연습> <나쁜 마음 버리기 연습> <혼자인 순간 나를 만나라> <침묵 입문> <부처의 말> <나를 버리는 연습> <못난 자신 버리기> <번뇌 리셋> <마음 공부>의 저자인 야마구치의 쇼겐지와 가나가와의 쓰쿠요미지 주지인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이 쓴 책이다. 이 책은 1장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 2장 '정신적 자급률 50퍼센트'를 권함, 3장 '너무 애쓰지 마라', 4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이라는 4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자신의 약점을 부정하거나 정당화하려 하지 말고 그저 존재 자체를 인정한다면, 그 깨달음의 힘이 자연스럽게 약점을 녹여서 우리는 어느새 강하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채근담>이라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하여 눈길을 끌었다.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노골적이기 때문에 경계하기도 쉽고, 그만큼 피해도 크지 않다. '이름을 좋아하는 자'는 명성을 욕심내는 사람, 다시 말에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구하는 사람이다. 본심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언뜻 피해가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눈치 채기 어려운 탓에 실제로는 피해가 매우 크고 강렬하다. 번드르르한 말은 속는 쪽이 꿰뚫어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속이는 쪽도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라는 명분에 가려 '사실은 상대로부터 신뢰를 잃는 것이 두려울 뿐'이라는 진실을 깨닫지 못하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자기 기분을 감추고 거짓말 하는 일이 쌓여 단단한 벽이 되면, 우리는 '사실은 그게 아닌데' 하는 자기 부전감(자신이 불안전하며,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감정.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자기혐오감이 동반된다)을 품게 된다. 원래 조금 어두운 사람인데 다른 사람과 있을 대면 억지로 기분을 끌어올려 밝은 척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소의 분위기를 잃는 데 과잉하게 반응하는 '과잉 적응' 상대가 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도의의 밖에 벗어나 있기에

그 피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얕다.

이름을 좋아하는 자는 도의의 안에 숨어 있으므로

그 피해가 감춰지기는 하지만 깊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 조울증이 많은 이유는 타인 앞에 있을 때 우리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위선이다. 그 자리를 얼버무려 넘기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싶다는 변명 뒤에 숨겨진 것은 '미움받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현대 사회에는 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과 만나 타인 앞에 있을 때는 즐거운 상태였다가 혼자가 되면 우울에 빠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죠. 이러한 조울증이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분위기에 따라 연기하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이 '무상'이라는 상황은 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극복하고 싶기 때문에 타인에게 제대로 인정받음으로써 자아를 확실히 안정시키고자 하는 것일지 모른다. 저자는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 나아가 '자신의 근거 따위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가는 의미는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아득바득 애쓰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라는 내용에 공감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확정하는 것, 완전한 존재로서 자신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때문에 항상 흔들립니다. 모든 존재가 변화하며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무상'의 정의이므로 인간의 이런 상황 역시 무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숫타니파타>의 구절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스스로를 인정해주고 싶은 본능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남들보다도 뛰어난 사람이길 바란다. 그러나 석가는 그렇게 자신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나의 내부와 외부의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라.

그러나 그것에 의해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만심의 기쁨은 평안이 될 수 없음을

현자들은 알고 있으므로."

 

"자만심에 의해 '나는 승리자야'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나는 패배자야'라고도 '나는 동등해'라고도

생각하지 않도록

어떤 질문을 들어도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지 않도록."

 

저자는 시비선악의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가 바로 불교에서 '염'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약한 자신을 웃으면서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미소 짓고 싶어지는 거리에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고인 더러운 진흙탕이지만, 그 진흙탕에 부드러운 염의 빛이 닿으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 '진흑 속에서 연꽃이 핀다'는 것은 불교의 다양한 종파에서 이용되는 메타포로, 더럽고 싫은 감정이 녹아서 따뜻한 기분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유일하고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받아들임'이 '인정받는 것'과 다른 이유는 무언가를 충족시키 덕분에 그런 미소를 얻는다든가, 무언가를 충족시켰기 때문에 받아들여준다는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저자는 '좋은 사람 그 자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갈애에 의해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람뿐 아니라 사물에 통용되는 원리이다. '아름다운 그림', '형편없는 그림'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A씨가 아름답다고 믿는 그림'이나 'B씨가 형편없다고 믿는 그림'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도 실재하지 않으며, '어떤 뇌가 좋다고 해석하는 일', '다른 뇌가 나쁘다고 해석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개념의 '무아', '무상', 공'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깨끗함/더러움'. '좋음/나쁨', '좋아한다/싫어한다'라는 개념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뇌가 왜곡해서 만들어낸 환영으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것을 금방 좋아한다고 믿어버리는 일도, 누군가를 금방 싫다고 생각했던 일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좋다거나 싫다는 것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저자는 스스로 약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다면, 이유를 붙여 아름답게 포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나약하고 보기 흉하고 한심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깨달아야만 마음을 치유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구나, 미움받고 싶지 않고 외로워서 상처 입은 자신을 숨기고 화를 내고 있구나' 하고, 나약한 자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부드러운 깨달음의 빛을 비춰줍시다. 이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이, 상처가 치유되고 화도 가라앉습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꽤 정신력이 필요합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과 괴로움을 치유하는 방법과 관련한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로 고, 집, 멸, 도 네 가지를 의미한다. 석가는 사성제의 첫 번째로 '고성제'를 설파했다. 고성제란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좋아하는 것과 계속 함께할 수 없는 것, 싫어하는 것도 해야 하는 것 등 살아가는 것은 ​괴로움 그 자체라는 진실을 가리킨다. 이는 사람이 무상과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해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일컫는 '일체개고'와 상통한다.

 

저자는 우리의 뇌는 만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습관이 있고, 실제로는 반드시 불만족으로 다시 돌아오는 구조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일체개고는 '모든 갈애에 의한 의지는 괴로움이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무언가를 갈구에도 결국에는 '불만족'이라는 '꽝'을 뽑을 수 밖에 없는 게임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를 절감함으로써 갈애가 약해져서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중간한 수준으로밖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것을 좀 더 좋게 하고 싶다'.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등 쓸데없는 갈망에 휩쓸린다. 결국 우리가 품고 있는 불만족, 즉 괴로움을 깨닫는 것이 이를 치유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

 

저자는 괴로움의 뿌리는 갈애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갈애라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결같이 추구해, 좋아하는 감각의 근원이 되는 것을 모아서 수집하려는 욕망이다. 이때 바람직하지 않거나, 감각을 저해하는 것은 배제하려고 한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마음이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을 늘려가려는 수집 충동과 불쾌한 것을 줄이려는 파괴 충동이 한 세트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원인이다. '고제'가 지금 자신이 괴롭고 불만족스러움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면, '집제'는 괴롱무의 원인인 지금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갈애를 꺠닫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내가 지금 괴롭구나'하고 깨닫는다면, 그 괴로움에 어떤 갈애가 숨어 있는지 찾아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의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괴로워했다니 안됐어. 힘들었겠네.'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주시하면 괴로움이 점차 치유된다. '집제'의 다음은 '멸제'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정말로 무언가를 억지로 없앤다는 느낌으로 기억하기보다 '치유된다' 정도의 뉘앙스로 기억하는 편이 훨씬 좋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괴로움은 적이 아니라 자기 고향집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안을 꽉 채운 괴로움이 업으로 쌓여서 그것이 형태를 조금 바꿔 지금 눈앞에 나타났을 뿐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괴로움과 마주하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향해 말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괴로움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저자는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들어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일이라고 말한다. 1단계가 '괴로움을 눈치 채는 것', 2단계가 '괴로움의 원인과 마주하는 것', 3단계가 '그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괴로움이 치유되는 것'이다.

 

우리는 훌륭하고 멋있게 보이기 위해 늘 자신을 꾸미려고 애쓴다. 그런 이미지를 가진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 하지만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자신이 너무 애쓰고 있음을 눈치 채고,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약한 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고, 웃어주고, 천천히 안아주자.

 

"애써 어떤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구나. 얼마나 자유롭고 마음 편한가."

 

저자는 타인에게 비난받거나 공격당하거나 험담을 듣거나 주의를 받거나 약점을 지적당하면, 우리 마음은 그에 저항하며 '그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거나 '상대가 틀렸어'. '상대가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라고 반박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억해두러야 할 것은 적어도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이나 행동을 나에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인생을 걸어왔기에,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생을 걸어왔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은 이해되지 않겠지만, 상대를 그렇게 하도록 만든 요소는 반드시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비판받는 것도 배신당하는 것도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며, 자신도 상대도 자연의 일부이다. 그 자연의 일부가 하고 있는 것이며, 일어나야 하는 것이 일어나는 것을 '나쁘다', '좋지 않다'고 왜곡하는 것은 자신의 괴로움을 늘리는 일일 뿐이다. 이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며, 불교적으로 말하면 내 업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고 수용했을 때 마음이 평정에 가까워진다."​

 

살아 있는 한 마음은 항상 괴롭다. 이를 도와주는 방법으로 첫째 나의 괴로움을 들어주고, 둘째 나의 괴로움​을 이해해주고, 샛째, 나의 괴로움을 미소로 받아들여주며 넷째, 나의 괴로움을 안아주자. 무상, 고, 무아의 포기를 유지한 채 그저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염에 철저히 집중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중요를 걸어가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겠다. 있는 그대로의 연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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