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이렌>은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 상과 유럽추리소설 대상, 페이퍼백 추리소설 대상, 코냑페스티벌 일등소설상, 미스터리문학 애호가상 등 전유럽 문학상을 휩쓴 피에르 르메트르의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3부작의 첫권이다.​ 이 책의 작가인 피에르 르메트르는 대학교수로 프랑스문학과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써내려간 한 편 소설로 2006년 코냑 페스티벌 신인문학상을 거머쥐며 55세의 나이로 등단하였다. <이렌>이 그의 처녀작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 책의 제목인 '이렌'은 소설 속 주인공인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의 아내의 이름이다. 왜 이 책의 제목이 이렌인가는 책의 결말 부분을 읽고 나면 이해되기 시작한다. 

카미유 베르호벤 수사 팀은 현장에 남겨진 가짜 손가락 지문을 통해 이 사건이 2년 전 트렝블레에서 발생한 또 다른 매춘부 살인사건과 연계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사건들의 공통점은 현장과 시신에 가짜 손가락 지문이 남겨져 있었다는 것과 어떠한 이유도 찾아낼 수 없는 범행과정상의 디테일들이 넘쳐 난다는 것. 그 무렵 카미유 반장의 아내 이렌은 임신 8개월째를 맞아 사건 수사에만 전념하는 남편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수사가 미궁에 빠진 카미유 반장은 그런 아내를 돌볼 겨를이 없어 심적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혹시 몇몇 탐정소설들의 범행 장면을 범인이 재현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는 추리가 떠오르면서 범인이 혹시 탐정문학광일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어느 탐정문학 전문지에 광고를 내기에 이른다. 그러자 범인에게서 뜻밖에도 카미유의 추리를 사실로 확인시켜주는 답신이 온다. 이후 카미유와 범인은 몇 차례에 걸쳐 이런 접촉을 이어간다. '르 마탱'지의 사회부 기자 필립 뷔송이 이런 접촉의 부당성을 대서특필하자 카미유는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그런 안팎의 협공에 굴하지 않고 카미유는 특별수사팀을 꾸려 계속 수사에 몰두하던 중 이렌이 범인에게 납치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카미유로서는 그 단서를 확보하기 위해 범인이 재현 대상으로 삼은 또 하나의 원작이 무엇인지 찾아 나선다.

<이렌>에서 ​145cm의 왜소한 체구를 지닌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이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흡입력있게 펼쳐진다. 카미유 베르호벤은 예리한 지성과 천재화가인 어머니의 예술적 감수성을 물려받은 인물이다.

"가물거리기 시작하는 의식을 마지막으로 모아, 그는 이제부터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두 가지 목표를 정리해두기로 했다. 첫 번째는, 자기가 지금 어루만지고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는 미처 기대할 수도 없었던 선물을 자기에게 안겨주려 하는 이 여인을 극진히 사랑하겠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가엾은 아가씨들을 살해하고 강간했을 뿐 아니라 토막 내서 벽 위에 전시하기까지 한 살인마들을 반드시 찾아내 자기 손으로 체포하고야 말겠다는 것."​

<이렌>에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책속에 등장하는 내용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그려내는 방식이 독특하다.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살인의 과정을 문학작품에 표현하는 과정대로 재현한다는 설정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살인마가 형사반장 카미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단순한 광기의 살인마가 아닌 지적인 살인마와 대결하는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소설의 끝부분에 드러나는 지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반전은 탐정소설의 색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제게 주어진 소명은 우리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표현한 허구적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종류의 과업입니다. 이 '정확하게'라는 부사어야말로 제 작업이 지향하는 중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최소한의 디테일조차도 다른 대상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주의 깊게 다룰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제 앞에 트여 있는 예술의 길은 바로 모사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재생해내는 사람, 중세 시대에 성서를 베껴 적어야 했던 수도승들과 마찬가지로 필경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를 사로잡고 있는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저는 자신을 억제해가며 고전명작들을 되풀이 읽는 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고전명작들과 친숙해지는 일은 저에게 영혼이 고양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주기도 했지요.(...) 탐정문학의 경이로운 성공은 세상이 얼마나 죽음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줍니다. 신비로운 수수께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작금의 세상은 이러한 이미지들에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이 이 이미지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는 오로지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전쟁 상황의 조성과 터무니없는 학살을 제외하면, 죽음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정치는 무엇을 비축해두고 있을까요? 바로 그 이미지들입니다. 인간은 불나방처럼 저돌적으로 죽음의 이미지를 향해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죽음을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술가들만이 그런 인간의 죽음 충동을 달래줄 수 있습니다. 작가들은 죽음을 원하는 인간들을 위해 죽음에 대해 씁니다. 그들의 써낸 허구의 참사들은 모두 죽음의 욕구를 진정시켜주기 위한 방편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늘 그보다 더 강력하고 실제적인 무언가를 원하기 마련입니다."

<이렌>에서 카미유의 어머니가 살아생전 <골이앗의 머리를 든 다윗>의 그림을 평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이는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처럼 독자에게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질문을 던져 놓는다.

"사람들은 흔히 악에 맞선 선의 투쟁이라고 이 그림의 주제를 단정짓곤 하지.

하지만 다윗과 그의 광기 어린​ 눈을 보렴. 골리앗이 드러내는 고통과 체념도. 여기서 선은 어느 쪽이고, 악은 어느 쪽이겠니? 여기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보이는구나......"

<이렌>에 등장인물인 발랑제르 교수가 이야기하는 탐정소설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탐정문학을 연구하는 발랑제르 교수의 이야기는 작가가 대중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렌>에 등장하는 발랑제르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문학에서 범죄는 사랑못지않게 오래된 주제'임을 이야기하며 탐정소설의 가치를 드러낸다.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 3부작의 첫권 <이렌>을 읽고나니, 다음 시리즈물에서는 형사반장 카미유 베르호벤에게 어떤 사건이 전개될지 더욱 기대된다.

"탐정소설은 오랫동안 하찮은 분야로 취​급받았다.이 소설 장르가 본격문학과 같은 대우와 권리를 누리게 되기까지는 거의 한 세기 이상이 걸렸다. 이른바 '유사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되어온 탐정소설 장르의 해묵은 소외는, 독자들과 작가들 그리고 편집자들이 오랫동안 무엇을 두고 문학적이라고 여겨야 하는지 합의해온 문화적 관례와 상응하는 결과였다. 또한 소재의 측면에서 주로 범죄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릇된 선입견을 불렀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어떤 유형의 작품만이 문학이라는 이름에 부합한다는 담합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문학의 정의에 대한 근거 없는 자명함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적 아집은 살인과 수사라는 소재가, 도스토옙스키에서부터 포크너에 이르기까지 또는 중세문학에서 모리아크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고전에 속한다는 평가를 받는 몇몇 문호들의 작품 속에서도 특별한 재료들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학에서 범죄는 사랑 못지않게 오래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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