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머즈 하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책 <클라이머즈 하이>는 2004년 발간한 해 일본 서점대상 2위에 오르고 문예춘추 걸작 미스터리 1위에 오른 일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작가인 오코야마 히에오는 기자 시절의 경험이 십분 발휘된 치밀한 구성력과 리얼리티 넘치는 서술로 진한 인간 드라마를 그려내 일본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실제 일어난 사상 초유의 여객기 추락 사건을 둘러싼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를 강점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영화기자회가 뽑는 블루리본 상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국내 일본 영화마니아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과거 후배 기자의 사고사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데스크 승진을 거부하던 지방신문 기자 유키 가즈마사는 어느 날, 산악회 동료와 함께 악마의 산이라 불리는 쓰이타테이와에 오르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출발하려는 날 밤, 지역에 있는 산인 오스타카에 524명의 사상자를 낳은 최악의 여객기 추락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건 보도의 총괄 데스크로 지명된 이는 다름 아닌 유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회사로 소환되어 일분일초 피를 말리는 보도 전쟁에 뛰어든다. 한편, 함께 산을 오르기로 약속했던 동료는 의문의 사고로 식물인간으로 발견되고 유키는“내려가기 위해 오르는 거지”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특종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욕망과 저널리스트로서의 치열한 고뇌, 신문사라는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비열한 암투, 유키는 두 개의 거대한 ‘악마의 산’ 사이에서 점점 궁지로 내몰린다. 

 

책 <클라이머즈 하이>는 524명 중 520명이 사망한 JAL 123편 항공기 추락사고를 통해 특종 보도를 위한 신문사의 욕망과 조직 내 암투를 다루었다. 신문기자로서 올바른 길을 걷고자 하는 주인공 유키의 의지가 돋보인 작품이다. 어떤 생명도 모두 소중하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미디어는 인간을 선별하고 차별하고 생명의 경중을 판단해서 그 가치관을 세상 속에 밀어붙인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신문사는 무거운 생명과 가벼운 생명, 중요한 생명과 그렇지 않은 생명을 판단해온 것이 아니었을까...

 

"편집국의 커다란 사무실에는 번민할 과거도 미래도 없다. 내일의 신문을 낸다. 그 단순 명쾌한 목적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을 공유하며 달린다. 노여움도 초조함도 분노도 단두대의 날처럼 내려치는 마감 시간에 의해 끊어진다. 그 순간 모두가 깨뜻하게 '오늘'을 던져버린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모여 마감 시간을 세팅하며 새로운 오늘을 팽팽하게 넷으로 배분한다. 찰나적이고 뒤끝이 없기 때문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이다. 건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싫어도 인간의 죽음에 익숙해진다. 누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죽든지 일이라고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쓰고, 인쇄기에 설고, 그리고 지면에 담아낸다. 자극에 익숙해지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 사무실에 있는 한 누가 누구보다 착하다거나 매정하다거나 따위를 비교하는 일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방신문 기자인 유키의 어린시절 암울했던 시간들과 아버지로서의 아들 준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유키는 어린시절 술 냄새를 풍기는 어머지의 품에 안긴 채 아버지가 증발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무의 상태, 공백 상태에 있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아주 하찮은 것으로 느끼게 했다. 결국 유키 자신 또한 아버지로서 실패했다. 유키는 아버지가 되면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면서 품에 뛰어 드는 장남인 준에게 당황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은 준이 어떻게 자랄 것인가 보다도 준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계속 자신을 존경하고 좋아해 줄까를 늘 신경쓰게 했다. 유키는 준의 눈치를 보고 준이 반항을 하려고 하면 무서울 정도로 냉담하게 대했다. 그리고 준은 어두운 눈동자를 가진 소년으로 자랐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과거가 유키가 사람을 의심없이 좋아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유키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밖에 좋아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설령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상대가 자신을 거절하는 표정이나 태도를 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좋아해주면 좋아해줄수록 상대에게 절대적이기를 요구했고, 그것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절망적인 기분에 빠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좋아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미리부터 그 마음을 의심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이 책의 제목인 ‘클라이머즈 하이’는 고도감을 잃고 흥분상태에서 산을 오르는 암벽등반가의 심리에 빗대는 말이다. 클라이머즈 하이가 풀리는 것은 무서울 것이다. 마음속에 모여 있던 공포심이 한꺼번에 분출하기 때문이다. 암벽을 오르고 있는 중간에 풀려버리면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오를 수 없게 된다. 유키는 고독과 무심의 상태를 얻기 위해서 산을 올랐었다. 산악회 회원 동료인 안자이가 유키에게 '내려가기 위해 오르는 거지'라고 산을 오른 이유를 설명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안자이는 단지 괴로운 장소로부터 도망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자이는 언젠가 아들인 린타로와 산에 오르고 싶어서 '내려가는 것'을 결의한 것이다. 로운리 하트에 가서 자신이 아닌 자신을 정리하고, 그리고 쓰이타테이와로 향하려고 했던 것이다. 안자이는 긴타칸토의 일원이라는 안정된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시 산악인의 길을 걷기 위해서 유키를 증인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유키는 입사 17년, 사람들의 혼잡함 속을 헤치고 나가듯 기자의 길을 돌진해 왔다. '내려간다'는 것 따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안자이는 꿰뚫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려가고 싶어 하는 유키의 내면을. 아니 내려가지도 머물러 있지도 못하고 어중간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화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려갈 것을 결심한 안자이는 유키에게 쓰이타테이와를 권했다. '도대체 넌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건가'하고.

 

"내려가기 위해 오르는 거지. 안자이의 말은 지금도 귓가를 맴돌고 있다. 하지만 내려가지 않고 보내는 인생도 잘못된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있는 힘껏 달린다. 넘어져도 상처를 입어도 패배를 맛보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계속 달린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의외로 그런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클라이머즈 하이. 오로지 위를 바라보며 곁눈질도 하지 않고 끝없이  계속 오른다. 그런 일생을 보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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