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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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14년간 173회에 걸쳐 '현대문학'에 연재되고 있는 안규철의 그림 에세이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으로 출간되었다.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2013년 10월 출간), <사물의 뒷모습>(2021년 3월 출간)에 이은 세 번째 이야기가 담긴 이번 에세이집에는 미술뿐 아니라 문학, 철학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작업해온 안규철의 일과 공부,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들이 57편의 스케치와 함께 담겨 있다.

저자는 잡초를 뽑아보면 그것들이 삶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갈밭이든 나무 그늘 아래든 그것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친다고 이야기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작은 풀 한 포기조차 스스로 포기하거나 누가 원한다고 해서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는 법이 없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나는 과연 잡초만큼 매사에 진심이었을까. 미술가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가장으로 그럭저럭 할 일을 하며 살아왔지만, 나에게 주어진 조건을 탓하고, 나 아닌 다른 것에서 포기할 구실을 찾고, 했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스케치북에 쌓여 있는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계획들은 결국 시작도 하기 전에 시작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람의 실패의 기록이 아니었던가."

저자는 나무들이 대개 단단한 줄기를 중심에 두고 가지와 잎을 펼쳐내며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만들어간다면, 담쟁이의 생존법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전체를 통제하는 중심이 없고,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는 정해진 형태가 없다. 각각의 잎사귀와 줄기 하나하나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중심이다. 담쟁이는 정해진 형태가 없으니 형태를 만드는 일에 힘을 쓸 필요가 없고, 거센 바람애 꺽이거나 뿌리 뽑힐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어떤 이들은 담쟁이가 남에게 빌붙어 산다고 멸시하지만, 이 세상의 누가 과연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특별한 그 무엇이 되려 하지 않으며, 그 일의 결과가 무엇이 되든 한결같은 자세로 미지의 영역을 향해 한 잎 한 잎 나아가는 것이 담쟁이덩굴의 미덕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뜻밖의 선물처럼 거대한 녹색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무릇 예술가의 일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나무에게 가지를 뻗어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하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뿌리가 양분을 찾아 끊임없이 전진하는 동안, 가지는 한 뼘의 햇빛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계속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선다. 언제 어디서 새로운 가지를 시작할지, 분기의 위치와 시기를 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나무의 일이며, 그런 나무에게 하루하루는 어제와 결별하는 일이라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나는 나무가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이 나무의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미술 작업 역시 익숙한 오늘과 헤어지는 일, 아는 길을 벗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길로 접어드는 일이다. 그렇게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며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무수한 가지들이 모여서 한 그루 느티나무가 되듯이, 나의 작업도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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