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혁명 - 인간적인 기술을 위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성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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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1968년 집필한 저서 <희망의 혁명>에서 인류가 두 가지 대조적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두 갈래의 길 중 하나는 완전히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사회로 인간 개인은 그 시스템의 작은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이 전적으로 인간의 복지를 향상하는 데 복무할 뿐인, 인본주의와 희망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상황이다. 에히리 프롬이 지지하고 꿈꾸는 인류의 미래는 물론 후자다. 그러나 현실의 흐름은 전자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기술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현상을 경고하면서 자신의 해법을 제시한다.

책 <희망의 혁명>은 50여 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낡았다거나 시대적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랍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에서 진단하고 우려했던 점차 기계화되는 사회, 인간의 두뇌보다 더 정밀하고 더 빠르게 작동하는 컴퓨터가 인간의 사고를 대체하면서 인간이 기계에 의존하고 부차적 존재로 전락하는 상황은 그 범위가 넓어지고 정도가 심해졌을 뿐 에리히 프롬이 예견한 그대로다. 몇몇 거대 기업과 기관이 전체 사회를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예측 또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등 초거대 IT 기업이 전 세계 경제와 인류의 일상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연상시킨다.

<사랑의 기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혁명>에서 기술사회와 기계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탁월하게 분석하며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뚜렷이 인식하게 한다. 나아가 '사물의 소유'와 '죽음'에서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사랑'으로 우선순위를 바꿀 용기와 상상력이 있다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고 역설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류의 미래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지금, 세계는 이미 첨예한 신냉전 시대로 들어섰다. 20세기 대표 지성 에리히 프롬의 영민한 시각과 통찰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1장 교차로, 2장 희망, 3장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나?, 4장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5장 기술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단계, 6장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6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에리히 프롬은 지금 가장 불길한 것은 우리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컴퓨터가 계산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그저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무엇도 하려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우연히 발견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술과 물질 소비만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 및 생명과의 교감을 상실했다는 에리히 프롬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종교적 신념과 그와 얽힌 인본주의적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은 기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에만 집중해서 깊은 정서적 경험을 하고, 거기에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을 느낄 능력을 상실해버렸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워낙 막강해지다 보니 기계가 자체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고, 이제는 기계가 인간의 생각마저 결정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자연을 두고 승리의 정점에 서 있던 인간이 어쩌다 자기 창조물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됐을까?"

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대상이 어떤 사물이 아니라 더 충만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일 때, 끝없는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해방일 때 진정한 희망이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에리히 프롬은 희이 약한 사람은 안락이나 폭력에 안주하지만 희망이 강한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모든 신호를 눈으로 보아내고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 태어나려 하는 것의 탄생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희망이란 존재의 상태라고 말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 내면의 상태, 열정적이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능동성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희망은 생명과 성장에 수반되는 정신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나무가 햇빛이 오는 방향으로 몸을 구부린다고 해서 그 나무가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희망'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희망에는 그 나무에는 없는 느낌과 인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그 나무가 햇빛을 희망하고, 태양을 향해 몸을 구부림으로써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도 틀린 얘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불굴의 용기는 희망과 신념을 공허한 낙관론이나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바꾸어 파괴함으로써 위태롭게 만들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불굴의 용기는 세상이 당신에게 '예'라는 대답을 듣고 싶어할 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에리히 프롬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겁 없음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니딜 때마다 강해지는 느낌과 기쁨이 확실하게 깨어난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생명의 본바탕인 희망과 신념은 그 본질상 개인적, 사회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초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생명은 항상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어느 한순간도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정체된 생명은 죽는 경향이 있다. 그 정체가 마무리되면 죽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 항상 움직이는 속성이 있는 생명은 현재의 상태를 깨고 나오거나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더 강해지거나 더 약해지고, 더 현명해지거나 어리석어지고, 더 용감해지거나 겁이 많아 진다. 모든 순간은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결정의 순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태만, 탐욕, 마음에 먹이를 주거가 굶긴다. 먹이를 주면 줄수록 더 강해지고, 굶기면 굶길수록 더욱 약해진다."

에리히 프롬은 절망의 신호는 어디에서나 보인다고 말한다. 지겸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필사적으로 사람들과 '접촉하려' 하는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접촉이 결핍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도시의 물과 공기는 날이 갈수록 독성이 강해지고, 가난한 국가에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기근이 닥치고 있는데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계획을 내놓지 못하는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희망에 관해 우리가 무슨 말을 떠들고,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가 생명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서거나,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는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절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조직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인간을 기계의 리듬과 요구에 종속된, 기계의 부속물로 격하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을 오직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인 호모 컨슈멘스로 바꾸어놓는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사회는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생산해내고, 또 쓸모없는 인간도 그만큼 많이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생산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인간은 더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나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그는 관심도 없는 일을, 관심도 없는 사람과 함께하며 시간을 보내고, 자신은 관심도 없는 것들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생산하지 않는 동안에는 소비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아무런 내부의 활력도 없이 담배, 술, 영화, 텔레비전, 스포츠, 강의 등 지겨움 방지 산업이 강요하는 것은 무엇이든 입을 열고 받아먹는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살아 있지 않은 것에 끌리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구조보다는 '법과 질서'를 선호하고, 자발적 방법보다는 관료주의적 방법을, 생명체보다는 가전제품을, 독창성보다는 반복을, 활기찬 것보다는 깔끔함을, 지출보다는 비축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생명의 통제 불가능한 자발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명을 통제하기를 운한다. 이들은 자신을 생명에 노출해서 주변의 세상과 합쳐지기보다는 생명을 죽이려 든다. 이들은 생명에 뿌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죽음과 도박을 벌인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반자동으로 조절해주는 일련의 본능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서는 만약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자신의 목숨에도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에리히 프롬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의심이 그 사람을 괴롭히고 그 의심은 고통스러운 긴장을 유발해서 심지어는 신속한 결정을 내릴 능력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 인간은 확실성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그는 자기가 결정은 내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옳았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싶어 한다. 뿐만 아니라 에리히 프롬은 확실성을 보장하는 존재는 인간의 믿지 못할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예측을 가능하게 하여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컴퓨터라고 말한다.

"사실 인간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과연 옳은 결정이었나 의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느니 차라리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선택을 확신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우상이나 정치지도자를 믿는 심리적 이유 중 하나이다. 우상이나 정치지도자는 사람이 의사결정에서 의심과 위험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 그 사람의 목숨, 자유 등에 대한 위험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 틀렸을 위험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 시대는 신의 대체품을 찾아냈다. 인격이 배제된 계산이다. 이 새로운 신은 모든 인간이 희생해야 할 우상이 되었다. 신성함과 확실성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계산 가능성, 개연성, 사실성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우리가 컴퓨터에 모든 사실을 제공해주면 컴퓨터가 미래의 행동에 대해 가능한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원칙이 뭐가 잘못일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말고 싶어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는 생물로는 유일한 존재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역사 과정에서 개발한 이런 능력, 그저 생물학적 생존 이상의 과정에 역할을 하는 능력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위대한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기와 공존하는 사회와 충돌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진실히 해당 사회의 생존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든, 방해하는 것이든 따지지 않고 실존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위대한 예술을 혁명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현실을 건드리고, 인간 사회의 다양한 과도기적 형태의 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 과정에 해당했던 모든 범주가 소유의 범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정적이며 움직이지 않는 에고는 대상을 소유한다는 측면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지만, 자아는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인은 '소유'할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에리히 프롬의 글이 인상적이다.

"에고 대 자아, 소유 대 존재에 대한 강조가 커지면서 우리 언어의 발달에서도 화려한 표현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가고 있다. "나 잠을 잘 못 자" 대신 "나 불면증이 있어", "나는 슬프고 혼란스러워" 대신 "나 문제를 갖고 있어", "내 아내와 나는 서로를 사랑해" 대신 "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갖고 있어"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 특유의 능력이 더 위대하게 펼쳐지는 데 기여하고, 생명을 조장하는 것은 모두 가치가 있거나 선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생명의 목을 조르고 인간의 능동성을 마비시키는 것은 모두 부정적이거나 나쁘다. 에리히 프롬은 불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위대한 인본주의적 종교, 혹은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인본주의 철학자들의 모든 규범은 이런 보편적인 가치관의 원리를 고유의 형태로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계와 컴퓨터는 생명 지향적 사회시스템에서 기능하는 일부로 자리 잡아야지,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결국에는 죽이는 암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계나 컴퓨터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고, 그 목적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결정해야 한다. 사실의 선택을 결정하고, 컴퓨터의 프로그래밍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관은 인간의 본성,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발현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습득되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가치관의 궁극적인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계획에서 최대 생산이 아니라 최적의 인간 발달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산업적 진보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전개가 사회 조직화의 우선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계가 모든 노동, 모든 계획, 조직화와 관련된 모든 결정, 심지어 모든 건강 문제까지 도맡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문제까지 도맡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인관계, 인간적 판단, 반응, 책임감, 판단이라는 영역에서는 기계가 인간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물질적으로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사라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갈등, 비극도 사라지리라는 가정은 유치한 몽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비와 생산 패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금욕주의나 가난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는 소비에 반대하고 삶을 긍정하는 소비여야 한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구분하려면 삶이 무엇인지, 능동성이 무엇인지, 자극이 무엇인지, 이 각각의 반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밑바탕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술사회를 인간화하는 데 필요한 혁명적 변화, 즉 기술사회를 물리적 파괴, 비인간화, 광기로부터 구원하는 데 필요한 변화는 반드시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시스템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변화가 일어나면 시스템 자체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 병적 증상을 다른 형태로 재현할 뿐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실천이 없는 아이디어는 메마른 장소에 보관된 씨앗과 같고, 그 아이디어가 영향을 미치려려면 흙에 심어야 하며, 그 흙은 사람 그리고 사람의 집단이라는 에리히 프롬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화혁명은 반드시 서로 다른 여러 이데올로기와 사회집단을 관통하는 급진적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공유하며, 자신을 알기 원하고,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더는 숨지 않으려 하며, 자신이 문화혁명의 목표로 구상하고 있는 인간의 핵심을 바로 여기서 실현하기를 원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대면 집단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들은 분권화된 탈관료주의적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자적 태도를 반대하고 능동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급진적 인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목적을 긍정하고, 광신과 파괴는 극복해야 할 인간의 약점이지, 다양한 합리화의 가면 아래 고양 시켜야 할 인간의 특징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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