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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종영의 글과 그림 - 불각(不刻)의 아름다움
김종영 지음 / 시공아트 / 2023년 7월
평점 :
부단한 시도와 천재성으로 시대를 선도한 예술가들이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조각가 김종영(1915~1982)도 그 중 하나다.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었던 거장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관점으로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성취해 냈다. 선비에 비유되기도 하는 고결한 성품으로 창작의 길을 걸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일생 헌신했다. 상업적 성공이나 화려한 이목을 좇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새로이 재조명되고 깊이 연구되어야 할 여지가 많은 작가다.
<조각가 김종영의 글과 그림>은 김종영 작가가 남긴 유고를 선별하여 오롯이 담은 책으로, 그의 예술 철학과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자 지금을 살아가는 창작자를 위한 의미 있는 이정표다. 각종 기고문을 비롯한 70편의 달하는 글이 소개되며 '조각가로서는 탁월하고 특이한 솜씨이며 감추어진 중요한 일면을 보여준다'고 평가되는 다양한 그림도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드로잉과 에스키스, 유화 작품은 물론 유년기부터 한학에 통달했던 김종영 작가의 필체가 담긴 수목화 등 도판 80여 점을 수록했다.
이 책은 1부 예술가, 시대의 거울, 2부 통일, 조화, 질서, 3부 예술, 그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4부 전통과 창조, 5부 조각, 정신과 물질의 결합체, 6부 현대미술과 비행접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록 대학신문 기고문 및 인터뷰 기사, 노트 기록이라는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김종영은 작품이란 작가의 예술적 충동을 그때그때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작품의 모든 세부는 구성의 통제 안에 있게 되는 것이며, 작품이 하나의 전체로서 있게 하고 작품을 정착시키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 구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는 예술가의 사상, 역사적인 자각, 개성 있는 창의성, 이런 모든 것들이 작품의 구성 속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는 누구나가 관중을 염두에 두게 되며, 예술가가 생각하는 관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많고 넓을수록 좋지만, 진정한 관중은 자기 자신이라는 김종영의 글이 눈길을 끈다. 자신을 기만하면 관중을 속이는 셈이 될 것이고,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그만큼 관중에게 성실하게 되기 때문이며, 결국 작품을 자신을 위해서 제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는 김종영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김종영은 창작을 위해서 작업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창작의 능려이 있다고는 더욱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개성이나 독창성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기보다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찰과 이해에 더욱 관심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연현상에서 구조의 원리와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고 조형의 방법을 탐구하였다. 무엇을 만드느냐는 것보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더욱 열중하여 왔으며, 작품이란 미를 창작한 것이라기보다 미에 근접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김종영의 글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질문한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를 알고서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허황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미를 나는 아직 본 적도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것은 전지전능의 조물주에 속하는 문제이다. 예술가가 미를 창작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술가와 농부의 말을 굳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수확한 열매를 맛보면 그만이다. 그들의 수확은 인간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한다.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한 것은 예술가와 농부의 미덕이다."
김종영은 예술가의 제작생활을 모성애에 비교해서 생각한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머니가 그의 자식을 길러 인간으로서 완성시키려는 노력은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최대의 사랑과 욕망이 거기에 있을 것이니 지혜 있는 어머니라면 자식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는 것을 구태여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머니가 그의 자식을 두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이 세상은 예술가에 있어서도 항상 거친 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작품에 대한 세상의 반향은 대개가 그것이 오해이기는 하나 늘 작가를 유혹하고 현혹시키는 것도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술가는 항상 대담한 선택과 집중과 인내와 긍지로써 자기 예술의 모든 안이와 거기에 따르는 행운의 결과를 물리치고 일종의 금욕적 수행에 의해 절대의 환락을 구하며 오로지 자기를 키워 가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김종영의 글을 통해 예술가와 작품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본질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다.
"완성된 작품은 예술가의 생리와 성정의 결과로서 제대로의 어떤 운명을 갖고 있다. 이것을 그 작가가 관심을 가져 본들 작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지나치면 매양 더 큰 손을 보게 될 것이다. 이보다도 예술가는 항상 자기의 생활권에서 성장과 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반복이 계속 되어야 한다."
김종영은 예술이란 거짓에 기초를 두므로 작가는 거짓이란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확고한 거짓 위에 자기의 예술이 되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저능한 작가는 작품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상을 무의미하게 모사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예술의 진실은 어디까지나 가공적인 거짓에 있는 것이고 진실한 거짓만이 예술이라는 김종영 작가의 글은 예술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한다.
김종영은 고무풍선처럼 가볍게 허공에 띄워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납덩어리같이 무서워서 겨우 앞뒤도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의 일과 생활을 투철하게 반성할 수 있는 소탈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김종영 작가의 글에서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김종영은 예술이 타락한 어떤 시대에서는 정신적 내용보다도 기술의 세련에 열중하였고, 마치 세련된 기술 자체가 예쑬인 양 착각하기도 했었다고 말한다. 그는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그릇된 예술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기술은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고 내용과 정신은 풍부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김종영 작가의 글이 눈길을 끈다.
김종영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일이 실제로 가능할 때는 거기에 대해서 말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어떤 말이고 어떤 이론이고 그에게는 다 쓸데 없는 일이다. 그는 새가 제 집을 짓는 데 대해서 무슨 말이 있겠으며 집을 지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할 것인가에 대해 반문한다. 이처럼 김종영 작가는 어떤 일이거나 이와 같이 주저와 곤란과 자랑이 없이 되는 것이고, 가장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동물의 본능에 흡사한 내부의 무의식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김종영은 작품에 대한 불안과 학문에 대한 불안을 따로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제작과정에서도, 면과 선의 효과라든지 양이나 모든 부분의 연결에 있어서 공간을 생각지 않고는 처리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김종영 작가는 이러한 이념이 자신의 작품에 반영된 데서 '사진발'을 잘 받지 않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러기를 바라고 싶은 것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작품이 어떠한 무엇으로나 기록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실제로 작품 처리에 있어 터치를 깨끗이 지워 버리기도 하고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도 많은 신경을 쓴다. 이렇게 해서 깍아 만든 조각으로서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하나의 객관체로서 자연스럽게 또는 필연적으로 작품이 있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자연의 묘사가 아닌 작품으로서의 생명감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공간에 있으면서 공간을 호흡하고, 언제든지 공간에서 죽어 없어질 수 있는 이러한 생명을 갖기를 원한다.
꽃을 그린 그림에서 나는 가끔 이런 것을 느낀다. 시들 수 있는 꽃과 시들지 않는 꽃, 샤갈이나 르동의 꽃은 전자에 속할 것이고 고루한 사실로 그려진 많은 꽃들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무엇이나 생명이 있을 때 그렇지 못한 것보다 사진발을 받지 않을 것이다. 조화가 아닌 생화를 사진 찍었을 때 그 생명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김종영은 젊은 학생들은 따분하고 답답한 것보다는 재미있고 자유로운 것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인간의 생활은 답답한 것을 견뎌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기술이 숙련되기까지는 답답한 초보기를 거쳐야 하는 것이고, 남을 용서하고 덕을 베푸는 인내와 답답한 가슴을 눌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임부의 십 개월도 답답한 것이지만 사랑과 희망으로 견디면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고, 환장의 안정이란 것도 답답한 것이지만 안정하지 않으면 탈이 생기게 되니 답답한 것을 견디면서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종영 작가는 기계는 인간이 답답하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기계가 답답한 것을 못 쓰며,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인생은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것은 답답한 것이라는 삶과 예술의 통찰을 이야기한다.
김종영은 오늘의 우리의 예술계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유희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작품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 이름을 얻겠다, 상을 타겠다는 공리심에 사로잡히고도 예술을 하겠다는 생각은 '난센스'라고 이야기한다. 김종영 작가는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자유로운 정신바탕에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고 공리가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예술가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용기이며, 자유와 용기와 사랑을 겸한 '휴머니티' 없이는 예술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고 보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살맏르은 모두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 그리스 조각에 유희성이 없는 것은, 그리서 조각가는 공리가 없는데는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종영은 우리의 생활을 충족시키고 생명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결코 어렵고 먼 곳에 있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의 신변에 충만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천체의 질서에서 물질의 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것이 우리의 생활권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술의 생성과 발전은 언제나 이러한 생활권의 질서에 있는 것이고 보니 의외로 우리는 누구나 다 쉽게 예술품을 즐기고 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김종영 작가의 글에 공감한다.
"예술이 인간생활에 있어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유는 매양 그것이 생명을 즐겁게 하고 씩씩한 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런 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빛나는 과거의 예술이 다 이러한 인간적 욕구를 그 시대의 기호에 따라 채워 왔던 것이며 이것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무한이 계속될 성질의 것이다. 예술작품의 사명이 생명에 관한 직접적이고 소박한 문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작가의 노력이나 그것을 감상하는 일반대중의 기호 등이 이러한 본질적인 요구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예술의 진정한 발전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각가 김종영의 글과 그림>은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했던 김종영 작가의 글과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으로 인상적이다. 이 책은 뼛속까지 진정한 예술가였던 김종영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통찰이 담긴 글을 통해 독자에게 예술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