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쇼펜하우어는 니체의 철학, 헤세와 카프카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라고 말해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그 어떤 철학자, 작가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떠난 지 1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오늘날까지 쇼펜하우어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저서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쇼펜하우어가 인생 그 자체를 텍스트 삼아 삶의 고통을 철학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고통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는 '비관에 대한 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행복해지고 싶어서 결국 불행해져 버린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쇼펜하우어는 일평생 열한 권의 책을 썼고, 그중 생전에 출판된 저서는 여덟 권이다.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1만 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는 그의 도서들과 편지, 일기 등에서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한 통찰과 정곡을 찌리는 인생 조언을 모아 엮은 책이다. 쇼펜하우어를 알고 있는 사람도, 알지 못했던 사람도 이 책을 읽게 되는 순간, 옛 철학자의 독설 안에 감춰진 열망과 투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에게는 좌절이 없고 그래서 영광도 없다고 말한다. 쇼펭하우어는 반면에 실패할 때마다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다시 일어선 사람에게는 영광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좌절을 떨치고 일어났다는 아문 상처가 새겨져 있으며, 절망의 끝이 어디쯤인지를 알고 있는 눈동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눈길을 끈다.

쇼펜하우어는 불명확한 인생에서 죽음보다 확실한 사실은 없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보다 명확한 전제는 없으며,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의 운명은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올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보다,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온다는 눈으로 목격한 사시보다, 겨울이 가면 따뜻한 봄날이 시작되리라는 부푼 기대보다 더욱 명확한 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쇼펜 하우어는 우리는 항상 죽음을 떠올려야 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허락된 이유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이 두려운 까닭은 공허와 암흙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허와 암흙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도처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죽음은 공간에 속한 육체와 시간에 대한 인지를 소멸시키지만, 삶을 이루는 기반, 즉 세계와 존재 사이에 이룩된 특수한 우정은 깨뜨리지 못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선별하고 시도하는 모든 활동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죽음의 감각을 일깨우는 필요조건이 되곤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동물과 동물로서의 인간은 고통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내구성이 강해서도, 고통에 대한 면역력이 강화되어서도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통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걸어가야 할 필수 과정이며, 절대로 사라질 리 없는 유한한 길이고 그 끝에 죽음이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완성하는 강력한 본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는 판단과 권위를 혼동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세상 사람들은 난제와 부딪혔을 때 권위를 따르면서도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판단한 것처럼 착각에 빠지곤 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권위를 갖춘 말을 인용했을 뿐이면서 마치 자신이 직접 고안해낸 결론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곤 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나약한 정신은 힘들게 자신의 이해와 통찰을 동원하기보다는 타인이 떨어뜨린 몇 마디 말을 잽싸게 주워 담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삼킨 후 배설하기를 즐겨한다. 손수 수고하여 바구니에 담은 과일보다 남들이 먹다 버린 썩은 과육의 배설물을 더욱 신봉하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이마저도 어려워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들은 손쉽게 지식인, 양식 있는 학자라는 이름표를 취득하곤 한다."

쇼펜하우어는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한심스레 여기고 있으며, 타인을 증오하는 중이고, 영혼과 육신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이럴 땐 그저 쉬는 게 최선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인상적이다.

"반성은 자기혐오다. 자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때 인간은 뭔가 반성할만한 건수가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뭘 해도 기운이 나지 않을 때 인간은 무턱대고 반성하며 자아를 성찰한다. 그럴 바에야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낫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도박도, 기도도, 명상도 도움이 안 된다. 여행도 도움이 안 되고, 술을 먹어봐야 자기혐오만 짙어질 뿐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자기혐오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혐오스러운 오늘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괴롭다면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평소보다 더 많이 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새로운 시작을 펼쳐 나가면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활동 그 자체로 본다고 말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다는 뜻이고, 내가 잘 산다고 느끼는 까닭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이야기한다. 행복은 '잘하고 있다'는 지속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눈길을 끈다. 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원했던 형상 내지는 상태를 획득하는 것을 두고 성숙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은 성숙한 인간이 되는 모든 과정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상태와 과정도 행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로서의 한 시기를 무사히 인고해 마침내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순간, 즉 애벌레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온전한 형태에 이르게 되었다면 나비는 지금뿐만 아니라 인고의 절정이었던 번데기로서의 시기까지 '잘해온 것'으로 입증된다. 다시 말해 나비로 완성되어 형태의 궁극인 비상을 이뤄낸 바로 그 시점에서, 생명체로서의 모든 시기가 행복했던 것으로 입증된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고난을 겪고 실패하고, 생명이 위협 받았던 것과 상관없이 그는 원했던 형태를 마침내 이뤄냈으므로 그의 모든 활동과 실존은 '행복'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성이란 인간다운 기능이며, 인간의 기능은 생식, 감각, 사유로 나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생식은 식물도 하는 일이며, 감각은 동물에게도 있지만 사유는 오직 인간에게만 내재된 기능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사유를 인생의 본질로 삼았을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진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은 사유이며, 생각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선한 삶이고, 삶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행복이 인간의 목표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순간은 이미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살아야 하는데, 잘사는 것은 특수한 기술이나 기능의 점진적 향상이 아니다. 잘산다는 말은 인간성이 원활히 발휘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성이야말로 인간 행복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쇼펜하우어는 우정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인간을 현명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우정만이 인간과 사물의 실상을 보여주며, 인간다운 정당한 삶과 방법을 말해준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무엇과 친해져야 하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소원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그것을 위해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인간에게는 더 크고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우정을 가진 자는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자다. 한 영혼이 쓰러지더라도 곁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둘이 함께 쓰러지는 법은 없다. 삶이 인간에게 우정을 선물한 까닭이다."

"우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고상한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내면에 자극이 되고, 분발하려는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함께 진보하지 않는 우정은 나태와 방종이다.

내적인 진보는 강렬한 영혼의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우정은 친구의 영혼을 깨우는 자명종이다. 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우정은 자기 본위의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우리가 참다운 우정을 부러워하면서도 일상에서는 소모적인 만남을 반복하는 이유는 잠에서 깨어난 영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나의 영혼의 무지와 무감각과 게으름으로 얼룩진 나 자신을 보고 절망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나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자극이며, 자극만 받고 이를 표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자극에 무뎌진다고 말한다. 이는 독서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자신의 주변에는 책을 너무 많이 읽는 바람에 자기 자신을 읽어버린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는 진리는 한 사람에 위해 만들어지고 창조되지 않으며, 길과 길이 이어져 전 인류가 도달하는 동산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다. 기독교의 신조차 성경이라는 책의 구조를 빌어 말씀을 보관하실 정도다. 그런 책을 사람이 이길 수는 없다. 게으른 성직자들은 성경만 볼 뿐, 성경에서 받은 자극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래서 육신을 잃고 껍데기만 남은 채 교리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일 인간의 무지한 소원이 이루어져 영원한 시간이 주어지고, 모두가 부유해지고, 늙지 않고, 사랑하게 되고, 병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는 권태 뿐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눈길을 끈다.

"인생은 여백만 남게 된다. 어제를 추억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기대해도 떠오르는 것은 거대한 백지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그리운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축제가 기다려지지도 않는다. 희열도 없다. 만끽도 없다. 배부름도 없고, 포근함도 없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지겨울 뿐이다."

"나는 천국에서 권태를 깨달아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느니 지금 사는 이곳에서 고난을 받고 싶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싶다.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 먹고 살 궁리에 연연하고 싶다. 인류에게는 고뇌로 가득한 세계, 대기의 압력이 죽을 때까지 가해지는 세계가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그런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 밖에 무대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불행과 고뇌와 절망에서 가장 빨리 위로받는 방법은 나보다 더 비참한 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평화로운 양떼가 동료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생애에 감사하고, 앞으로의 삶에 연연하게 되는 정신의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도 양떼와 같은 운명임을 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들소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사자의 의지와 사자의 송곳니에서 벗어나려는 들소의 의지 중 누구의 의지가 더욱 강렬할 것인가. 누군가를 삼키는 쾌감과 누군가에게 삼켜지는 불쾌감의 인식은 어느 쪽이 더 클 것인가.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쇼펜하우어는 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탐욕에 길들여지고, 이름을 얻은 자는 그 이름 앞에 굴복하는 이름들을 늘리려고 무고한 희생을 계획하게 되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가진 자는 빼앗김을 두려워하고, 이름은 얻은 자는 기억하지 못함을 뚜려워하며 산다고 이야기한다.

"가진 자의 관심은 가진 것들을 향하고, 이름을 얻은 자의 관심은 그의 이름에만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의 영혼은 비워진 항아리와 같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속이 어두워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들지만 직접 손을 뻗어 더듬어 보면 차가운 옹기그릇에 손가락이 아릴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계급과 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지금 하는 일에 따라 존경과 멸시를 판단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해주고 있다면 그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지만 세상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방한 부자들을 존경하고, 우리의 생활을 존속시켜주는 농민와 노동자의 수고는 천시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진 자들이 머릿속에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전가하는 계획밖에 들어있지 않다. 국가는 노동자의 생활을 부유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데, 결과적으로 노동의 대가는 국가와 소수의 정치가와 기업가의 몫으로 떨어지고, 노동자에게는 힘든 과정만이 남겨진다."

쇼펜하우어는 자연은 우리를 낳은 부모인 동시에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대의 위협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이 거대한 자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우리의 죽음에 자연이 상심하는 법은 없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죽음마저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연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녀들을 무수한 위험과 고난 앞에 방치한 채 방관만 하고 있다. 그들이 죽더라도 다시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자연에게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회귀, 오랜 방황 끝에 집으로 돌아온 귀소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허무를 모르는 인간은, 생활에서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인간은 모두 길들여진 타인이라고 말한다. 그 자신에게 그의 현재는 그의 본성과 대립하는 타인이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먹이'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먹이라는 환경에 안도하며 안주할수록 그는 스스로에게 영구적 타인으로 남는다고 이야기한다.

"국가는 자신을 위협하는, 길들여지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빵을 던져주고 있다. 그 빵을 먹이고 나날이 성장하는 것은 내 안의 타인이다. 그는 나의 이름으로 가족 곁에 머물고, 나의 얼굴로 거리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의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나의 입술로 당나귀처럼 빵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어느새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쯤되면 사회는 하루에 던져주는 빵의 개수를 줄이면서 민중이 허기진 배를 느낄세라 채찍질을 가한다. 아픔으로 공복을 잊게 해주는 것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민중이 된 타인은 고독보다 아픔을 선택하고, 사회는 형벌의 채찍 후에 몇 개의 마른 빵으로 민중을 달랜다. 6일간의 채찍질과 일요일, 단 하루의 빵이 우리가 고독을 두려워한 결과였다. 자유를 결핍보다 두려워한 대가였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은 삶에 용기와 결단을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삶은 우리에게 철학을 통해 정신의 여우를 보상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철학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여유로운 마음가짐이라고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자기 사항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사색하지 않는 자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수정하는 능력과 용기는 주어지지 않는 법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첫째는 어떤 성과에도 낙관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쁨과 열망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사람은 세계라는 대상을 향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못한다. 철학은 우리에게 질문을 요구한다. 그것이 곧 용기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명한 이치에 대한 반항이다.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외부의 강압에 의해서라면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은 그 어떤 목적에도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목표를 쫓아가서도 안 된다. 욕망이라는 의지와 여깨를 견줘서도 안 된다. 인생이란 우리의 내면에서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고유한 직관의 연속이다. 직관이라는 단어가 낯설다면 계시를 떠올려도 좋다. 삶의 순간들에게 찾아오는 계시를 우리는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서 철학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와 그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글을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이 책은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다."라는 칼 구스타프 융의 말처럼 고통과 고난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의 진지한 의미를 이야기하는 쇼펜하우어의 글에 모두 밑줄을 긋고 싶을만큼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