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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예술 - 붓으로 금기를 깨는 예술가가 전하는 삶의 카타르시스
윤영미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6월
평점 :

자신의 본성이나 하는 일의 본질을 깨닫고 정의 내리는 사람들만이 이르는 경지가 있다. 어릴 때부터 붓을 갖고 놀며 '글씨가 곧 사람이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한글 서예가 윤영미. <인격예술>은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나 기교의 행위가 아니라 인격을 담는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작가 윤영미의 삶과 작품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제도권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견딘 30년의 시간이 만든 독특한 '순원체'로 쓴 작품 47점과 고독한 예술가로 살아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가 쓰는 글씨는 어떤 금기도 없어 자유롭다. 붓이 주는 강렬한 힘과 서예가의 감정선이 합쳐진 글씨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이 책은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은 '1장 무엇을 위하여 삶을 견디는가, 2장 금기를 깨면 편안해진다, 3장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 내 것이다, 4장 고독하기에 자유로울 수 있다'라는 4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먹을 간다는 것은 생각을 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운동선수는 뛰기 전에 준비운동을 하고, 요리사는 재료를 준비하면서 만들어질 요리를 상상하고, 검객이 칼을 갈 듯 서예가는 먹을 갈면서 붓의 움직임을 미리 읽어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래된 벼루에서 먹을 돌디며 자신을 위로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자신이 가장 자기다울 수 있는 시간,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재편되고 확장되는 몰입의 경지가 주는 충만함보다 더 큰 보상을 아직 모른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반복을 좋아하지 않는 기질이지만, 유일하게 즐기는 반복이 먹을 가는 일이다. 적당한 속도로 둥글게 팔을 돌린다. 내 감정의 리듬을 맞춰가며 돌리고 있는지 모른다. 멈추려 하지 않는 관성이 붙으면 팔은 무의식적으로 돌고, 머릿속은 깨끗하게 비워진다. 무아지경이 찾아온다. 무당이 신내림을 받고 뛰고 있는 모습이 겹쳐진다. 반들반들하게 벼루를 연마하듯이 생각의 응어리를 갈고 있었다. 누군가가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만져주고 조금씩 나는 순한 어린아이처럼 온순해진다. 벼루 바닥이 훤히 보였던 맑은 물이 점점 검어지더니 제법 먹물로서의 이름값을 하려 한다."
저자는 인생에 진로를 변경해 버리는 것만큼 황홀한 자유는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제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게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첫째는 서예가가 된 것이고, 둘째는 40대 후반에 서예원을 폐원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무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를 누리고 싶었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일정표에서 지워지는 자유와 계획되지 않은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여전히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고, 작업을 하고, 공부를 한다.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껏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생겼고, 사람들을 마주할 자유를 누린다. 마음껏 글을 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 이제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여전한' 것들에 '그렇지만 마음껏'이 일정표를 채우기 시작하고부터 내 인생에 꿈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저자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 갑자기 고독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고독은 불안하지 않았고 너무도 완전해서 가슴 시리도록 안전한 고독이었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작업실에서 안전한 고독을 느끼고 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나만의 작업실 공간이 생긴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전한 고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허락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 공간은 오롯이 나로만 채워져 있다. 내가 쓰는 붓, 내가 쓰는 종이, 내가 쓰는 노트북, 내가 아무렇게 적어 놓은 쪽지들, 내가 꽂아 놓은 필기구들, 내가 듣는 스피커까지도 다른 누군가의 손때라고는 하나 없다. 난방기가 돌아가는 소리까지도 조용히 듣고 있으면 이젠 내 숨과 맥박 소리만큼 익숙해졌다. 지나가는 차의 속도가 느껴지고 간혹 폭주족의 오토바이 굉음까지도 안전한 고독 속 나의 일상이 되었다."
저자는 아무 일 없이 산다는 것은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경계선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어제와 똑같은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고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똑같은 계절을 느끼고 똑같을 일상으로 들어가는 것, 아무 일 없이 산다는 것은 축복이며, 특별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무위자연은 글씨를 쓸 때도 기운생동 못지않게 매우 귀한 요소라고 말한다. 저자는 의도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은 일부로 흉내 내어 만들어 낼 수 없는 최고의 경지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삶에서도 글씨에서도 이것만 제대로 된다면 자신 있게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말한다. 저자는 화려한 듯 고고하고 안정적인 궁서체보다 '순원체를 닮은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로우면서도 대범하고, 변화무쌍하면서도 일관되고, 촌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사람이기를 원한다는 저자의 글이 흥미롭다.
"나의 글씨는 나를 닮아 있다. 어설픈 듯 자유롭지만 질서가 있다. 삐뚤빼뚤하지만 어지럽지 않다. 재미있지만 엄격하다. 힘이 있지만 부드럽다. 사람들은 이전에 본 적 없는 나의 글씨를 '순원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쓰이기 때문이다. 서예사 문헌을 뒤져도, 교본을 뒤져도 찾아볼 수 없는 글씨다.
매일 나를 닮은 글씨를 쓰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느낌이 바뀌고 해가 지나가면 또 달라져 있다. 나 역시 매일 변하기 때문이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글씨가 나를 닮은 게 아니라 내가 점점 글씨를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순원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인데 내가 글씨대로 변해 하고 있었다."
저자는 '아님 말로'라는 단어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단어라고 말한다. 저자는 힘 있는 필체로 아무렇지도 않게 O를 돌리고 세로획을 내려 그으니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하다가 '고'의 마지막 가로획을 마무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치유가 되곤 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님 말고'는 저자 자신이 남과 조금은 다른 서예가로서 겪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다스려 주고 당당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말한다.
"'아님 말고'는 끝없이 부정적일 수 있는 내 마음에 '스톱'을 걸어주었다. 이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욕심을 버려도 괜찮다는 뜻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욕심이 자리하는 순간 마음은 지옥이 된다. 스스로 그 지옥에 들어앉아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특히 사람에 대한 욕심은 별안간 누군가를 미워하게도 만들고 뭔가를 계획하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가며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저자는 글씨 값은 작가의 작품에 품격을 더해 주고,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있도록 응원하는 개인의 사회적 기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게으른 서예가가 열심을 부렸던 것은 하고자 할 때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가 글씨 값과 연결이 돼 있음을 깨닫고부터였다고 이야기한다.
"젊은 작가들의 열정페이를 원하는 단체나 사람들을 보면 인상을 찌푸렸다. 예술가가 이슬만 먹어야 진정한 예술가 취급을 받는 시대는 끝났다. 배고픈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예술가는 없다. '헝그리 정신'이라니. 작업자가 돈이 있어야 많은 정보가 오고가고, 작업자가 돈이 있어야 공부를 더 하고, 작업자가 돈이 있어야 후견인도 만들 수 있다. 세상에서 오직 자기의 작품 앞에서는 영원한 갑이 되어 대중을 마주하길 바란다. 예술가의 돈을 속물처럼 마주하는 어른을 대하면 난 그들을 퇴물로 대접한다."
저자는 하얀 화선지가 까만 글씨로 채워질 때 불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머릿 속으로 만들어지는 글자의 획을 만족스럽게 살겨 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붓을 가지고 마르게도 흥건하게도 세워서도 눕혀서도 그어 보다가 이거다 싶은 획을 만나면 강박은 비로소 사라진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그저 붓을 들고 있으면 불편한 것이 사라지고 헛헛한 감정도 사라진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것이다. 붓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느낄 때 불안감이 사라졌다. 마른 붓이 흥건히 적셔지는 기쁨을 볼 때 불안감은 사라졌다."
"강박은 내가 해야 할 것,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일종의 자석이다. 자석의 힘에 저항하는 것은 무모하다. '유혹을 이기는 것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강박을 이기는 것은 강박에 저항하기보다 순순히 넘어가는 것이다. 그 강박이 가리키는 곳이 내가 지금 있어야 할 곳임을 알려 주는 유용한 지표로 삼으면 된다. 강박에 넘어가면 강박이 사라진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