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뉴욕 수업 - 호퍼의 도시에서 나를 발견하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뉴욕 수업>은 2018년에 처음 선을 보인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의 개정판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저자 곽아람의 뉴욕 생활에 드리웠던 에드워드 호퍼의 영향이 더욱 뚜렸해졌기 때문에 그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가해 다듬어 새로이 펴낸 것이다. 단기 이민에 가까웠던 뉴욕에서의 시간 동안 저자 곽아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접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 예술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지나치게 빠르게 몰아치는 도시의 파도에 떠밀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그림들, 미술관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예술작품들이 제 품을 내어주며 위로해주었다. "괴테처럼 살겠다 결심하고 뉴욕으로 떠나 호퍼처럼 산 이야기"라고 자신의 책을 정의하는 저자 곽아람은 <나의 뉴욕 수업>에서 뉴욕에 머물며 들었던 미술 수업, 생생한 아트 비즈니스의 세계, 그리고 스스로 몰랐던 '프로 놀러'의 기질까지, 다양한 경험과 사유를 에드워드 호퍼, 로버트 인디애나, 알렉스 카즈, 조지아 오키프 등 대도시의 흔적을 담아낸 작품들과 함께 풀어낸다.

"이 책은 2018년 출간된 <결국 뉴오커는 되지 못했지만>의 개정판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뉴욕 생활에 드리웠던 호퍼의 영향이 더 뚜렸해졌기 때문에 호퍼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가해 고쳐 썼다.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 삶을, 예술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가 예전에 비해 꽤 넓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기뻤다. 그 성장의 바탕에는 '호퍼의 도시'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이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이 <나의 뉴욕 수업>이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호퍼처럼 도시의 인물들을, 풍경들을, 순간들을 포착하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나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기록했다. 의식적으로 호러를 따라 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알아차려보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호퍼의 작품처럼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 나만의 이야기지만 독자들과 함께하면 더 좋을 이야기가 되었다."



저자는 뉴욕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여러 명이 함께 살았지만 잠들 때와 눈들 때는 항상 혼자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방문 밖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주면서도 때로는 외로움을 배가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안방에서 자신이나 룸메이트가 각각 눈을 떠 호퍼의 <아침해>라는 제목의 그림 속 여인처럼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아침을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혼자이면서 넷, 넷이면서 혼자인 풍경, 식사시간에 한집에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식탁을 차리던 그 기묘하게 쓸쓸한 풍경과 호퍼의 그림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해>는 뉴욕에서의 공동생활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그림이다. 침대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긴 여자. 아무 장식 없는 간단한 침애와 그림 하나 걸리지 않은 텅 빈 벽이 그림 속 여자의 고립감을 더욱 강화시킨다."



저자는 시카고에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과 만난 일은 미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호퍼와의 만남 중 정점에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술관에서 호퍼의 그림을 바라보며 제 안에 품은 빛을 쏟아내고 있는 것만 같은 레몬빛 벽을 골똘이 응시하면서, 바텐더마저 사라져 텅 빈 실내를 상상하고, 밤거리의 신호등처럼 홀로 불 밝힌 채 서 있는 식당 풍경을 그려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이 그림을 이야기하며 호퍼는 말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나는 대도시의 고독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무의식으로부터 고독한 공간을 끄집어내 화면에 재현하고, 무의식 속 외로운 인물들을 그 공간에 배치했다. 심상을 읊어내는 시인처럼, 호퍼는 마음속 이미지들을 화폭에 옮겼다. 그래서 그림 속 식당은 어디에든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환영 같지만, 실재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무의식에는 고독한 공간의 이미지가 가라앉아 있고, 호퍼의 식당오 그 중 하나니까."



저자는 뉴욕에서의 일상이 견고해져가자 에드워드 호퍼는 불식간에 자신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밤에 창밖을 내다보면서,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자주 호퍼를 떠올렸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뉴욕에 오기 전까지 호퍼는 고독한 사람들이 아니라 고독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저자는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호퍼는 자신에게 특별한 화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카네기홀에서 호퍼의 <뉴욕 영화관>을 생각하며 계속해서 안내원을 지켜보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공연 때마다 관객들에게 프로그램을 나눠주고, 자리를 안내하고, 관객들의 돌발 행동을 감시해야만 하는 직업이 지루하면서 외로우리라 섣불리 넘겨짚었지만,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공연에 몰두해 있었고, 관객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피아니스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박자가 빨라질 때는 발을 까딱였고, 흥겨운 가락이 나올 때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자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박수쳤다. 저자는 그림 밖에서 그림을 볼 때와 다른 시선으로 다시 <뉴욕 영화관>을 천천히 보았고, 안내원과 함께 그림 속 한 장면이 되고나니 그녀도 관객들과 함께 공연을 즐기고 있다 싶어 전혀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언제나 고독하다 여겼던 호퍼의 그림 속 인물에게 청년 쇼팽의 선율과 더불어 다정한 위로가 될 것 같은 장면이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연주를 감상하던 붉은 제복의 공연장 안내원.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선 채로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모습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 영화관>이 떠올랐다. 영화관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떠오르면 푸른 제복의 안내원만 홀로 조명을 받는다. 진짜 영화는 그림 왼쪽 구석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스크린이 보이는 자리로부터 소외된 안내원이 정작 영화 속 주인공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그려진 그림이다. 영화관 입구에 서서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채 오른손으로 턱을 괸 안내원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단절, 지루함과 쓸쓸함을 읽어냈다. '현대인의 만성적 고독'이라는 어구는 호퍼의 그림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는 단골 키워드다. 나 역시 호퍼의 그림을 볼 때면 습관적으로 고독을 이야기하곤 했다. 타성에 젖은 게으른 감상일 수도 있겠지만 '호퍼'라고 하면 자연스레 외로움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자는 호퍼의 <촙 수이>는 뉴욕의 중국 음식점에 앉아 찻주전자를 앞에 놓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성을 그렸다고 말한다. 1920년대 신여성답게 과감하게 보브 커트를 한 머리에 종 모양의 클로슈 모자를 쓴 여자들,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정면을 향한 여자의 얼굴과 연두색 상의, 관람객들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또다른 여자의 청회색 등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저자는 뉴욕 시절의 자신이 차이나타운에서 자유를 느꼈던 것처럼, 그림 속 여성들은 촙 수이 식당에 앉아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며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림 속 식당 이름이리도 한 '촙 수이'란 각자기 채소에 고기나 해산물 등을 넣고 볶은 미국식 중화요리를 말한다. 1920년대 미국에는 촙 수이를 파는 식당이 유행했는데, 값싸고 후딱 먹을 수 있서 젊은 노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여성해방운동이 활기를 띠던 제1차세계대전 직후의 미국, 여성들은 더이상 집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일터로 나섰다. 이전에는 홍등가 여성들이나 자기들끼리 외식을 하는 걸로 여겨졌지만, '모던 걸'들은 남자들처럼 공공연하게 식당에서 식사하며 도시의 풍경을 바꿨다."



저자는 뉴욕에서 생활하는 1년 동안 자신의 방 벽에는 딱 한 점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고 말한다. 우연히 들른 샬롯 브론테 전시를 본 후 모건라이브러리 기프트숍에서 산 샬럿 브론테의 초상화다. 그리고 저자는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그 맹세대로 뉴욕에 있는 동안 정말 열심히 놀았고, 학교도 다니고 크리스티 수업도 들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시간들은 공부라기보다는 유희에 가까웠다고 이야기한다.

"미로 같은 뉴욕 생활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초상화를 스카치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았다. 침대에 누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벽에 붙은 샬럿의 얼굴이 보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죽은 그 여자가 자유롭게 네 맘대로 살아보라고 격려해주는 것 같았다."



저자는 이민자들을 생각할 때면 영국 화가 포드 매덕스 브라운의 <영국에서의 마지막>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라파엘전파의 일원인 브라운은 라파엘 스타일의 원형 캔버스에 영국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 가는 한 쌍의 부부를 그렸다. 1850년 중반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가 번창하고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에 골드러시가 시작되면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인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여겨지곤 했다. 저자는 빈곤을 완화시키고 영국 본토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이민을 권장했으며, 그림 속 주인공도 새 삶을 찾아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익숙한 모든 것들에 작별을 고하고 갖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완전히 낯선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이민자들이란 결국 '더 나은 삶'을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브라운의 그림은 마냥 희망적이지 않다. 화가는 고국에서 쫓기듯 떠나와 넉 달간의 고된 향해에 나선 이 부부의 고난에 주목한다. 그림 뒤편의 구명보트에 적힌 '엘도라도'라는 배의 이름이 부부가 미지의 황금 땅, 신기루 같은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내의 회색 망토 사이고 살짝 비어져나온 자그마한 손이 부부가 새 생명을 함께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서양미술 전통에서 고향을 떠나는 부부와 신생아는 헤롯왕의 학살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하는 성가족을 상징한다. 화가는 자신과 아내 에마를 모델로 해 그림을 그렸다. 교육받을 만큼 받은 세련된 중산층이 이민 떠나는 배 안에서 각종 불편함과 모욕을 견디며 절망하다가 포기하기 직전까지 이르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화가의 의도였다. 우산에 의지한 채, 부부는 아비규환의 배 안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애써 등을 돌리고 있다. 검정 챙 모자 아래 남편의 눈빛을 심각하며, 진홍빛 보닛에 둘러싸인 아내의 얼굴을 무표정하다. 이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더라도 성가족에 못지않은 수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위스콘신 출신의 조지아 오키프의 1925년 작품 <달이 있는 뉴욕 거리>는 오키프가 처음 그린 뉴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번화한 도시 뉴욕이 오키프의 눈에 왜 그렇게 쓸쓸하게 비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위스콘신의 드넓은 평원에서 나고 자란 오키프에게 뉴욕이라는 대도시는 매혹적이면서도 낯설고 삭막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키프와 마찬가지로 지방 소도시에서 자라 대도시 서올로 온 자신은 뉴욕에 올 때 서울 이상으로 고독했다고 말한다. 오키프는 1925년부터 1929년 사이에 약 25점의 뉴욕 드러잉과 회화를 그렸고, 주로 낮 풍경보다는 밤 풍경이었다. 저자는 오키프는 밤의 뉴욕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심취했고, 그건 곧 그녀 마음속의 풍경이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오키프는 여러 방면에서 모던한 여자였지만, 그중 가장 모던한 것은 그녀가 그려낸 뉴욕 그림이라고 말한다. 나이 많은 남자 예술가의 뮤즈였던 젊은 여자 예술가가 처음으로 뉴욕의 고층 빌딩이라는 남자들의 뮤지를 제 것 삼아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고층 빌딩의 스카이라인에 의해 조각난 하늘 사이로 구름이 일고 그 구름을 비집고 달이 비죽 얼굴을 내민다. 하늘은 아직 푸르다. 노을의 잔영이 서쪽 하늘에 남아 있다. 교회의 첨탑이 붉은 하늘을 꿰뚫는다. 그리고 달보다 더 환한 도시의 빛, 가로등, 적막한 도시를 지키는 서글픈 외눈박이 괴물 같은 노란 가로등 불빛이 건물의 붉은 실루엣에 우수를 더한다. 맨해튼 47번가의 밤풍경을 그렸지만 뉴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림이 화려한 불빛의 전시작 같은 전형적인 뉴욕 야경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오키프는 언젠가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뉴욕을 그릴 수는 없어도 느끼는 대로 그릴 수는 있다.""

"오키프가 뉴욕을 그렸던 1920년대,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은 모더니티와 진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여자가 그리기에 적절한 주제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여자 예술가가 건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꽃이나 그리면 될 일이었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