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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 그린 - 버지니아 울프 단편집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평점 :
20세기 문학의 혁신을 이룬 영국의 작가 버니지아 울프는 사망 직전까지 50여 편에 달하는 단편 소설을 썼으며, <블루&그린>은 지금껏 소개되지 않았던 스케치글을 포함하여 총 18편의 보석 같은 최고작을 엄선하여 담은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집이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이나 어둠의 정서로만 비쳤던 오인의 그늘을 벗어던진다. 페미니즘, 여성 퀴어 등 시대를 초월한 주제의식을 포함해 다정함, 따뜻한 사랑, 유머와 위트,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비행"을 끝없이 추적하는 열정에 놀라운 온기를 느낄 것이다.
이 책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불가사의한 V양 사건'은 문명의 도시에서 유령 같은 존재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V양이라는 여성에 대한 화자의 시선을 만나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존재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삶이라는 촘촘한 사슬에서 떨어져 나가 영영 모두의 의식 속에서 사라지는 여성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화자는 V양의 회색 그림자를 찾아 나서겠다면서 V양의 집으로 갔지만, 화자가 발견한 것은 V양의 죽음에 대한 소식 뿐이었다. 이 소설은 마치 가구처럼 존재감을 잃어버린 여성 V양의 이름인 메리 V를 부르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며, 개별적인 정체성을 지닌 여성에게 필요했을 인간이라는 생명력을 빼앗아버린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깊은 여운을 전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 날이 밝을 즈음에 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메리 V, 메리 V! 처음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정확하게 불러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치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있는 듯 별 의미 없는 수식어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외침은, 물론 별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스름한 방 안에 V 양은커녕 그녀와 비슷한 사람도 불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은 하루 종일 나의 외침이 머릿속에 맴돌았으며,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든 예전처럼 그녀와 마주치고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급기야는 한밤중에 뜬 눈으로 누워 있다가 한 가지 엉뚱한 계획을 떠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공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점점 진지해져서 내가 직접 메리 V의 집에 찾아가 보겠다는 마음까지 먹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단편 '존재의 순간들 '슬레이터네 핀은 끝이 무뎌''을 통해 남자의 보호만을 위한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크레이 선생님에 대한 제자 페니의 시선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페니는 크레이 선생님은 자신의 일상을 져버려야 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아서 안전했고, 그녀가 결혼했다면 일상의 습관들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 "그녀라는 존재의 샘에서 은빛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라는 페니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내어 인상적이다.
"드디어 핀이 보였다. 페니 윌모트는 그것을 집어 들고 크레이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외로웠을까? 아니다. 선생님은 안정적이고 축복 받은 삶을 사는 행복한 여자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패니는 그 기쁨의 순간에 그녀를 놀라게 한 거였다. 그녀는 카네이션을 똑바로 세워 든 채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피아노 앞에 반쯤 돌아앉아 있었다. 그녀 뒤로는 커튼이 젖혀진 창문을 통해 보랏빛 저녁 하늘이 보였다. 음악실에 있는 갓 없는 전등에 불을 밝히니 창문 밖에 펼쳐진 보랏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꽃을 쥔 채 몸을 조그맣게 말아 앉은 줄리아 크레이는 마치 망토를 뒤로 펄럭이듯 런던의 밤을 벗어던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채 홀연히 앉아 있는 그녀의 둘레에는 영혼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기운, 그녀가 만들어 자신을 둘러싸게 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페니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단편 '동감'에서 험프리 해먼드라는 남성의 죽음을 통해 한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다양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무상함과 죽은 자에 대한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하는 작품으로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지냈던 한 젊은 남자는 자기 안에 죽음이라는 엄청난 위력을 감추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기를 멈춤으로써, 별개였던 존재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이들을 융합시켰다. 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동안 창문이 열린 그 방에서, 그는 조용히 물러갔다. 그의 목소리는 미미했으나 그의 침묵은 심오하다. 망토를 벗어 우리 발밑에 깔아주듯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았다. 그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우리는 세상의 끝까지 따라가서 내다보지만, 그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다. 그의 모습은 창공으로 사라지고, 우리에게 남은 건 다정한 초록과 파란 하늘뿐. 하지만 투명한 세상에 그의 자리는 없고, 그는 길이 끝나는 곳에 모여 있는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새벽빛을 가르며 사라졌다. 그는 떠났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단편 '단단한 물체들'에서 유리알 등 단단한 물체들을 수집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려가는 남자 존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특히 수집된 물체들에 자신이 함몰되면서도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존의 모습은 인간의 영혼을 앗아가는 집착과 강박을 드러내는 장면은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한 필력을 그려내어 인상적이다.
"자신의 수집품을 하나씩 들여다볼 때면, 존은 그것들을 능가하는 물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다. 그는 점점 더 결연히 탐색에 전력을 기울였다. 언젠가 진기한 잡동사니를 무더기로 발견하면 모든 노고가 보상될 것이라는 야심과 확신이 없었다면, 그가 참아내야 했던 피로와 조롱은 차치하고라도 그 과정에서 마주해야 했던 숱한 실망감들 때문에라도 그는 그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끝에 고리를 단 긴 막대를 들고 가방을 둘러맨 존은 흙더미를 보이는 대로 뒤지고 다녔으며 무성한 관목들 밑을 긁어보았다. 그가 찾는 물건들이 버려질 것 같은 골목과 벽 사이의 공간들도 뒤졌다. 수집하는 물건에 대한 기준이 높아지고 취향이 까다로워질수록 수시로 마주해야 하는 실망감도 커졌다. 하지만 언젠 신기한 표식이 있거나 특이하게 깨진 도자기나 유리 조각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그를 옭아맸다. 존은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그는 더 이상 젊지 않았고 정치가로서 그의 이력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찾아오지 않았으며,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에 그는 너무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진지한 열망에 대해 누구에게 얘기하는 법도 없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