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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임 머신 -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
캐시 오닐 지음, 김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4월
평점 :
20여 년간 월스트리트와 IT업계에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빅데이터를 연구한 수학자 캐시 오닐은 [대량살상수학무기]를 통해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사실은 편향적이며 취약계층에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녀는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책 <셰임 머신>에서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외모, 가난, 젠더, 피부색, 정치적 입장 등 다방면에 걸쳐 왜곡된 수치심이 구조하되고 이를 정치적,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 수치심 머신을 고발한다. 그리고 수치심 머신을 역이용해 혐오와 불신으로 분열된 사회를 치유할 해법을 제시한다.
이 책은 '1부 수치심은 돈이 된다, 2부 혐오는 어디서 시작되고 확산되는가, 3부 정의감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라는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면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 습관, 도덕 등 관련 규범에서 파생하는 감정이다. 내가 기준에 못 미친다고 자각할 때, 또는 같은 반 친구나 동료, 슈퍼볼 광고가 기준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 수치심이 우리를 덮친다. 어떤 때는 그저 기분이 나쁜 정도겠지만 수치심으로 깊은 상처를 받으면 자아가 공허해지고, 인간 존엄성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며, 내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수치심이 날리는 잔인한 펀치다."
<셰임 머신>의 저자 캐시 오닐은 어린 시절부터 뚱뚱함이 콤플렉스였으며, 날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과 그러지 못한 스스로의 간극에 의한 수치심을 오랫동안 체험해왔다. 체중 감량 실패를 수없이 반복하며 다이어트 업계가 사람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자각했다. 이후 알고리즘의 차별 문제를 탐구하며 비만뿐만 아니라 빈곤, 중독자 등 취약계층의 삶이 어떻게 플랫촘을 통해 조직적으로 소비되고 조롱당하는지 목격했다. 그 미난이 자신의 비만을 대하는 시선과 놀랍게도 흡사하며, 그들 도한 암울한 삶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사회 균열의 근원에 왜곡된 수치심이 있고 이를 알고리즘이 극대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사회를 계급화하고 통제하는 도구로써 수치심과 디지털 플랫폼, 알고리즘의 상관관계를 파헤친다.
저자는 약물 중독 문제의 경우, 사회는 피해자를 비난하고 이들을 타인으로 밀어내는 쪽을 훨씬 편하게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은 가치관이 독특해서 어리석고 끔찍한 선택을 하는 자들로 분류했다. 저자는 이는 중독자를 '타자화'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해자를 낙오자로 취급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가족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낙인은 수치심을 낳는다. 낙인은 가치 있는 자와 아닌 자를 알려주는 사회적 신호이기 때문이다. 각종 기관과 정부가 낙인찍는 역할을 자처할 때, 한 사람의 가치를 예단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온 세상이 내게 쓸모없다고 말하면, 나 자신도 거기에 동조해버린다."
"약물 중독에는 깊은 수치심이 따라오므로 중독자는 도움을 선뜻 요청하지 못한다. 피해자의 일탈행위에 집착하는 사회는 치료법이든 대체 약물이든 보통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감옥으로 보낸다. 대형 제약회사부터 민간 교도소까지 상장 회사들을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피해자가 수치심 때문에 거부하지 못하는 제안을 하는 식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이윤을 취하고 자신들의 제국을 영원히 번성시킨다. 사이비 재활시설은 이른바 노동 치료를 통해 비극적 현실을 잔인한 희극으로 바꾸는데, 어떤 시설은 기간제 노역과 비슷하게 운영된다. 모든 것이 수치심의 악순환을 불러오고, 업체들의 배를 불린다. 표적 고객의 수치심이 커질수록 업체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저자는 미국에서 빈곤층은 가장 힘이 약하다고 말한다. 제도적 수치힘에 빠진 이들을 실패를 거듭한다. 또 이들은 신세를 망친 것도 너고 비참한 선택을 한 것도 너라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듣는다. 저자는 정부 지원금을 받을 자격이 있어도 신청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까다로운 신청 절차를 거치다 보면 인간적인 모욕을 느끼기 때문이다. 낮은 자산 상태, 급료, 실패 경험, 낙담, 굴욕을 문서화하여 낱낱이 입증해야 한다. 저자는 체중과 중독의 대한 조롱처럼, 가난에 대한 조롱도 해로운 악순환을 낳는다고 말한다.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문제를 숨기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수치심 때문에 생기며, 상황을 악화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가난이라는 수치심을 없애려면 사회는 빈곤층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많은 이들에게 가난이라는 수치심은 물질적 고통보다 더 끔찍할 수 있다. 그러나 예산이나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달러는 기록할 수 있어도 감정은 그럴 수 없다. 감정은 형체가 없고 주관적이어서 종종 무시된다. 그러다 보니 복지정책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엔진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은 신체와 정신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고통받는다. 의식주와 교통비 같은 기본적인 생활수단이 부족한 데다, 자신의 처지에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하루하루 다급한 문제가 터지는 상황에서 다음 달이나 내년에 대한 계획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난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이 뚜렷해도, 약자를 탓하는 주류 담론을 섬세한 시각으로 뒤집기는 힘들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부유층은 일하는 사람만 도와야 한다는 조건을 계속 내건다. 그러고 패스트푸드점과 대형소매점에서 받는 치욕스러운 저임금을 얼마 안 되는 수당으로 보조한다. 이런 식으로 사회는 일하는 빈곤층을 다람쥐 쳇바퀴에서 계속 굴린다. 빈곤층은 자동차가 고장 나거나 아이가 아플 때 쓸 여윳돈도 없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쓴다. 우리 사회는 일하지 않는 빈곤층을 극빈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한마디로 실패한 사람이 대가를 치르고 현재의 불행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는 근시한적이고 동시에 비도덕적이다. 이를 바꾸는 핵심 방법은 남을 비난하려는 우리의 온갖 본능에 반하더라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돕고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남들처럼 주거지와 의료서비스, 식료품을 얻고 아이를 돌볼 수 있으며,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들에게 생필품을 준다는 이유로 공무원들 앞에서 굽실거리게 하거나 각종 요건을 먼저 갖추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건강관리 산없에서 가장 왜곡된 곳은 노화를 감추기 위해, 더 나아가 노화를 늦추거나 뒤집기 위해 방대한 제품과 서비스를 쏟아내는 분야라고 말한다. 이 산업은 노화가 심각한 불행이라고 강조한다. 나이가 들면 허약하고, 추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감이 떨어지며, 측은하고, 산송장과 같다고 본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거대한 수치심 머신은 비만, 약물, 중독, 가난, 허약함을 이용하기 위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힘과 시장 지분을 얻는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존엄성 침해를 자각하려고 애쓰는 것이 수치심 머신을 해체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수치심은 각각의 사회적 실패에 작용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각종 사회 문제를 겪을 때, 다음과 같이 안이한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런 끔찍한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들 잘못이다.' 이렇게 수치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매번 시선을 돌리고, 다리 밑에서 노숙자를 만나면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우리는 이들의 안전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을 존중하고 포용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우세한 수치심 머신을 떠받드는 규범을 영구화함으로써 현재의 유감스러운 현실이 지속되도록 도와준다. 뚱뚱하고 가난하고 중독된 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잘못된 선택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인정해버리면, 우리 역시 그 문제의 일부가 된다."
저자는 바디튠으로 보정한 수영복 사진을 공유하는 것부터 트위터에 정의로운 척 소신 발언을 올리는 것까지, 이 모든 온라인 활동은 거짓과 망상을 부추긴다고 말한다. 이런 행동은 세상을 달리 규정하는 것, 그리고 나의 수치심을 다른 사람을 통해 해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게다가 모든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좋아요', '공유하기', 이모티콘으로 공감을 표시하므로, 우리는 이런 반응에 현호되기 쉽다. 저자는 수치심 네트워크는 우리를 부지런히 끌어들여, 그 안에서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때마다 잠깐씩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옹졸한 권력감이나 분노, 복수심 같은 감정에 중독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나한테 관심을 주는 듯한 소규모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과도한 감정에 몰입하지만, 그 감정을 기계적으로 자극하는 허술한 시스템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 시스템은 바로 영속적으로 굴러가는 수치심 머신이다.
저자는 수치심 네트워크를 끝없이 최적화한 한 가지 결과가, 이른바 캔슬 문화의 급증이라고 말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를 발판으로 한 이 흐름은 거대한 마을 의해가 동네 주민에게 말이든 행동이든 온갖 훈수를 두는 상황과 비슷한다. 사람들은 이런 공격이 사회적 순기능을 한다며 쉽게 정당화하고, 공개적 망신은 사회를 더 건전한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여긴다. 저자는 동시에 개인에게 퍼붓는 온라인 조롱은 범죄와 처벌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제시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공정성을 논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면서 동시에 수치심 전략에 대한 질문이다. 온라인에서의 맹비난처럼 무기화된 수치심은 분노에 찬 저항운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충동적 비난을 자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도덕성을 과시하는 트윗이 정작 근본 분제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관계 끊기는 종교적 배척과 비슷하다. 즉 신앙을 떠났다는 이유로 친구 혹은 이웃이었던 사람과 말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 선의를 내세우기도 한다. 사회에서 인종주의를 추방하고, 여성을 존중하며, 성 정체성을 밝힌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말이다. 그 과정은 여러모로 네티즌 수사대의 활동과 닮았다. 아마추어 탐정들은 SNS에 올라온 게시물을 샅샅이 살핀다. 소프트웨어로도 이 작업을 수행한다. 그러다 말이든 행동이든 허물이 될만한 증거를 찾으면 팔로워를 총동원해 실수한 사람을 공격한다. 결국 그 사람이 해고되거나 사임하게 하고, 평생 낙인을 찍는다."
저자는 비만, 가난, 약물 중독, 인종차별 등 어떤 문제를 겪고 있든, 아니면 뭔가를 이루려고 안감힘을 쓰고 있든, 우리는 각기 다른 수치심의 차원에서 저마다 선택과 마주한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어느 한 영역에서는 확고한 자세를 보이며 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반면, 다른 영역에서는 매우 풀어진 태도를 보인다. 저자는 어느 날 오후, 인종 차별 반대 시위에서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과 대치하며 용감히 싸우던 사람이, 잠시 짬을 내 접속한 트위터에서는 독설을 마구 내뱉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한쪽에서는 낙인찍기에 반대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낙인찍기에 몰두하는 등 우리는 수치심에 관한 한 점잖으면서 동시에 무자비할 수 있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오늘날 수치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은 기업 가치가 수조 달러에 달하는 디지털 플랫폼으로, 그중에서도 구글과 페이스북이 가장 주목받는다고 말한다. 이 기업들은 인터넷 이용 기록을 추적해 표적 광고를 하고, 우리에게 디지털 주홍 글씨를 붙이며, 진실이든 허구든 가장 수익성 있는 단편적 정보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저자는 수치심은 억눌린 생각과 무언의 두려움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비밀은 수치심의 서식지이자 온상지다. 저자는 수치심에 맞서려면 진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수치심 머신을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이를 해체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대대적인 청산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려면 우리는 냉정하게 초당파적 진실을 수용하면서 나름의 화해 절차를 거쳐야 한다. 미투 운동이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수치심과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증언에 나서기도 했다."
"수치심 머신과 치르는 전쟁의 다음 단계는 혈세가 들어가는 공공서비스 부문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다. 공공서비스가 가난하고 불우하며 중독에 시달리는 자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매 순간 이들에게 수치심을 주지는 않는지, 현실에서 이러한 존엄성 침해가 어느 정도이고 신뢰에 바탕을 둔 제도는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 문제는 수치심을 주지 않고도 해결할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저렴한 공공주택으로 수백만 서민에게 거주 공간을 마련해 주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또 마약에 중독된 이들을 향한 경찰의 무작위 몸수색을 없애고 중독자 쉼터에 들어가게 하면 이들의 존엄성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개인 차원에서 우리는 떼로 몰려가 약자를 비하하는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고, 친구나 이웃 나아가 인류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수치심에 대한 자각력을 길러 이를 세심하게 사용한다면, 그리고 공유 규범을 강제하는 목적으로만 이를 활용한다면, 사랑하는 가족을 비롯해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인생이 밝아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수치심 렌즈를 끼고 일상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제 수치심이 생기는지, 어떤 소통방식이 수치심을 낳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난민을 무시하는 이민국 직원의 태도, 열두 살 난 딸에게 뚱뚱하다고 무안 주는 엄마의 행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저자는 다음 과제는 수치심을 낳는 행동을 포착한 다음 이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신앙심을 비웃는 행동이 사회에서 자주 본 모습을 따라 한 것인지, 개인의 상처나 불만에서 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일종의 개종 전략인지 살펴본다. 또 이들이 사제에게 학대당한 피해자를 비난하는지 아니면 교회를 향해 비판하는 것인지, 또 그런 비난으로 누가 이득을 보는지, 그 이득이 돈인지 지위인이 관계의 우위인지를 따져본다. 답은 명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런 질문을 머릿속에 인지해야 우리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저자는 머릿속에 수치심 항목을 만들어 놓아야 무례한 댓글, 추잡한 비교행위, 남을 폄하하려는 리트윗, 불가능한 기대치 등 자존감을 꺽는 행동을 자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