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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ㅣ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평점 :
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그린 <사나운 애착>으로 자전적 에세이의 독창적인 글쓰기를 선사한 비비안 고닉의 두 번째 책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노년의 나이가 된 비비안 고닉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이라는 장소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우정과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의 제목처럼 비비안 고닉은 사랑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자신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동시에 타인과 함께했던 흔적의 장소를 펼쳐낸다.
비비안 고닉은 삶이 불능의 총합처럼 느껴지려 할 때면 타임스스퀘어까지 산책을 나섰고, 세상에서 가장 요령 넘치는 하층민들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면 금세 통찰이 회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비안 고닉은 가면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건 오직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비비안 고닉에게 뉴욕의 거리를 거리는 시간은 해방감과 자유로움, 시간의 확장성, 그리고 삶의 깊은 깨달음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어느 순간-어쩌면 하루아침에-거리에서의 우연한 마주침을 계기로 깨닫게 됐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내면의 공백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한 주가 지나고 또 다른 마주침이 있은 후 이상하게도 생기가 감도는 느낌이 들었다. 세 번째 마주침 만이었다. 피자 배달부와 유쾌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좀 전에 주고받은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풀이됐고 더 깊어졌다. 무언가 다음어지지 않은 풍성한 에너지가 가슴속 텅 빈 공간에서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비안 고닉은 뉴욕의 다양한 장소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들여다보며, 사적인 서사를 들여줄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를 지닌 우정의 의미를 고찰한다. 비비안 고닉은 관능적인 사랑의 모습을 닮은 친구 에마와의 우정,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사회로부터 거부되는 삶의 동질성을 경험하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 동성애자 레너드와의 우정 등 관계가 지속되면서 어떻게 우정이 변해가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이 책은 비비안 고닉이 우정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 속에서 성장해가는 그녀의 진실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핵심은 사랑하는 이가 존재할 때 표현하는 자아가 꽃을 피우리라는 기대다. 모든 것은 그 활짝 핀 자아에 얹힌다. 하지만 각자의 내면에 있는 그 불안한 것, 유동적인 것, 변덕스러운 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만개한 자아를 꾸준히 갉아먹고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 실은 표현을 하고 싶어하는 자아라는 가정 자체가 환상이라면? 안정적인 친밀감에 대한 열망이-그보다 더하진 않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무진장한-불안정해지려는 열망에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럼 어떡해야 하는 걸까?"
비비안 고닉은 주변부보다 변방의 경계에서 삶을 살아온 여성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세계를 바라보는 비평가답게 여성 작가들의 내밀한 삶과 작품의 이야기를 꺼내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이 책에서 작가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에 관해 비평하는 비비안 고닉의 독보적인 눈이 인상적이다. <짝 없는 여자들>의 캐릭터 로라가 느꼈던 혼란이 그녀를 생생한 인물로 만들어 내듯이, 실패의 순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과정은 여성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짝 없는 여자'란 거부당한 존재가 당당히 홀로 자신의 내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뉴욕 변방의 브롱크스에서 자라난 비비안 고닉은 노년의 나이가 되어 두 번의 결혼과 이혼, 평온함과 안정을 가져다 주지 못한 사랑의 속박과 두려움과 같은 삶의 다양한 실패와 거부를 받아들이고 인간 존재의 경이로운 순간들을 깨닫는 변화의 과정을 마주한다.
"19세기 말, 현대 여성을 다루는 대단한 책들이 문학계 천재 남성들의 손에 의해 쓰였다. 20여 년간 토머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조지 메러디스의 <교차로에 선 다이애나> 등의 작품이 나왔다. 하나같이 강렬한 감동을 주는 소설들이었지만 내게 직접 말을 걸어 온 건 조지 기싱의 <짝 없는 여자들>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마치 내가 실제로 아는 여자들 남자들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를 '짝 없는' 여자들 중 한 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이래 페미니스트들은 반백년 주기로 '신'여성이니 '자유로운' 여성이니 '해방된' 여성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기싱만큼은 제대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우리는 '짝 없는' 여자들이었다."
비비안 고닉은 누군가는 떠나고 사라지는 뉴욕의 거리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기 표현력이라는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비안 고닉은 뉴욕의 도시 위에 쌓여진 무수한 목소리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뉴욕의 거리 위를 산책하면서 사라지지 않는 장소 위에서 질곡의 시간들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늘날의 뉴욕이라는 도시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없어선 안 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목소리들이다. 전 세계 도시란 도시에는 골목 돌길이며 허물어진 교회며 유적이 된 건축물마다 민중이 심겨 있다. 하나같이 몇백 년 동안 한 번도 파헤쳐진 적 없이 그저 켜켜이 포개어 올려진 것들. 뉴욕에서 나고 자란 이의 삶이라는 건 구조물이 아니라 이 목소리들-그 어떤 목소리도 다른 목소리를 밀어내지 않고 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을 다루는 고고학과도 같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온 뉴욕이라는 도시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실패와 거절을 딛고 진정 원하는 본연의 모습으로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비비안 고닉의 솔직하고 빛나는 글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깨끗한 길이 아닌 번잡스럽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하지만 삶의 민낯이 그대로 보이는 뉴욕의 거리를 걷는 비비안 고닉은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책은 스쳐간 장소는 한 인간의 역사이며, 그 역사들이 모여 도시를 만들고 그렇게 인간은 서로를 기억하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