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2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한경arte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는 명화를 통해 유럽 왕조의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시리즈’가 두 번째 책으로, 합스부르크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럽 명문 중의 명문가, 부르봉가의 250여 년을 우리에게도 친숙한 명화와 함께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독특한 명화 감상법과 유려한 스토리텔링으로 수많은 팬을 사로잡은 저자 나카노 교코는 이 책에서 부르봉 왕조의 시작과 영광, 그리고 몰락까지의 역사와 그와 연관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명화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낸다. 저자 나카노 교코가 선별한 명화와 부르봉가의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미술과도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저자는 부르봉가는 옛 카페 왕조의 방계에 해당하며, 부르봉이라는 명칭은 부르봉 라르샹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영국 등의 지원군을 얻어 이를 물리친 앙리는 마침내 국내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개종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 선언을 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대귀족은 금으로 매수했다(전쟁을 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먹혔다). 역대 왕들 가운데 유독 앙리 4세의 인기가 높은 것은 ‘낭트 칙령’을 선포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길고 긴 종교 전쟁을 끝낸 정치적 결단력 덕분일 것이다. 1594년, 마흔 살의 앙리 4세는 마침내 가톨릭식으로 대관식을 올렸고, 환호성 속에 파리로 입성했다. 이 해야말로 부르봉 왕조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왕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일시적으로 왕비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마리의 강력한 희망에 의한 대괼식 다음 날 앙리 4세가 쉰여섯 살의 나이로 살해당했다고 말한다. 앙리 4세는 그동안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뉜 프랑스를 다스려왔지만 본심은 프로테스탄트 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줄곧 받아왔고, 그러한 가톨릭 측의 불만이 사건을 일으켰다. 저자는 재판에서는 광신도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븐터 이미 왕비 미니 흑막설이 들려오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상은 어둠 속에 감취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혼 13년째, 독일 원정을 앞둔 앙리는 자리를 비운 동안 왕비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기 위해, 생드니 성당에서 마리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녀의 영광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만큼, 당연히 루벤스의 연작 회화에도 〈생드니에서 거행된 마리 드 메디시스의 대관식〉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다. 공중에서 금화를 뿌리는 천사들의 오른쪽 특별석에서 앙리가 식순을 지켜보고 있다. 뒤쪽의 여성들 중 마리만큼 살집이 있는 여성이 시샘하는 표정으로 대관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당한 전처 마르고다. 이렇듯 일부러 패자를 등장시켜 공격하는 부분에서 마리의 인간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저자는 루이 14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신격화했다고 말한다. 루이 14세의 진짜 목적은 자신이 얼마나 전능한지 널리 알려 국내에서 구심력을 모으고, 국외에도 강력하게 어필하는 것이었다. 그 철저함과 능수능란한 선전 덕분에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마치 아폴론에게 바치는 신전처럼 화려한 베르사유궁전은 태양왕 루이 14세 지배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왕은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되어 하루 24시간 중 사적인 시간이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항상 세계의 중심에 있는 태양처럼 눈부시고, 때로는 남김없이 상대를 불사르는 태양왕. 그 외에는 어떤 정체성도 허락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베르사유라는 무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 활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달까. 말은 쉽지만, 어지간히 그 역할이 마음이 들었거나 보통 각오가 아니면, 또는 아주 특별히 둔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초상화를 다시 살펴보자. 망토 하나만 봐도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것이 분명한데도, 조금도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신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저자는 루이 16세는 태양왕 루이 14세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도 없었고 루이 15세와 같은 미모의 은총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신성까지 잃어버리면 남는 것은 왕의 그릇이 아니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예로부터 타나토포비아(죽음에 대한 공포)는 왕과 귀족들의 정신병으로 알려져 있고,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은 자가 허탈감으로 인해 깊은 늪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저자는 루이 16세만큼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루이 16세는 ‘덕질에 푹 빠진 은둔족’에 가까웠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고통스러웠고 루이 15세 이상으로 궁정 의례를 싫어해서 대관 이듬해에는 국왕의 성사(聖事)까지 중지해 버렸다. 이 성사는 왕의 손이 닿으면 병이 치유된다는 민간 신앙에 부응하기 위한 행사였는데, 이제 더는 시대의 합리적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구실을 붙여 민중과 직접 접촉할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크나큰 실책이었다. 비록 단순하게 왕의 손을 거룩한 손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줄어들겠지만,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적의 요소가 빠지면 국왕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왕조를 이어가는 의의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루이 16세는 태양왕 루이 14세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도 없었고 루이 15세와 같은 미모의 은총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신성까지 잃어버리면 남는 것은 왕의 그릇이 아니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부르봉 왕가는 자부심만 비대해지고 유연성은 부족해 자멸의 양상을 띤 종언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장대한 베르사유궁전과 세계를 상대로 프랑스의 문화적 우위성만은 훌륭하게 남겼다. 프랑스가 완전히 공화정을 되찾은 것은 나폴레옹 3세를 쫒아낸 1870년부터였다. 그리고 1886년, 인연 깊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사람들은 모금을 통해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