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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브의 세 딸>은 메블라나 문학상, 터키 소설상, 문화예술 공로 훈장 기사장상 등을 받았으며 튀르키예(구 터키)를 대표하는 작가로 널리 알려진 엘리프 샤팍의 장편 소설이다. 엘리프 샤팍은 작품 활동을 하며 튀르키예 정부로부터 튀르키예 모욕죄 혐의를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튀르키예의 속사정을 샅샅이 들추어낸다. <이브의 세 딸>은 튀르키예의 사회적 혼란, 정치, 종교 문제, 여성 인권 등 다양한 이슈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편 소설이다. 한국어판 <이브의 세 딸>은 국내 최고의 튀르키예 문학 번역가인 오은경 번역가가 튀르키예어판을 직번역한 것으로, 생생한 번역을 통해 그 감동을 전달한다.
<이브의 세 딸>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하여 정치적, 문화적으로 혼란스러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페리는 종교에 회의적인 아빠와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인 엄마의 아래에서 혼란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낸다. 이로 인해 페리는 항상 중간에 끼인 채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페리의 삶과 이스탄불이라는 배경이 맞물리면서 혼란스러운 튀르키예의 상황이 속속들이 밝혀진다.
작품에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주인공 페리뿐만 아니라, 종교를 극단적으로 비판하는 무신론자이며 당당하고 주체적인 성격의 쉬린,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 히잡을 쓰지만 동시에 페미니스트인 사려 깊은 성격의 모나가 등장한다. 이들은 작품에서 각각 ‘한 명의 죄인, 한 명의 신자, 한 명의 방황하는 영혼’으로 묘사된다. 이들의 우정을 통해 살아온 배경과 가치관의 차이를 뛰어넘는 여성들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브의 세 딸>에서는 종교적 가치관으로 싸우는 부모님 사이에서 짓눌린 페리의 어린 시절, 자신과 너무나 다른 두 친구를 만난 페리의 대학 시절이 현재 세 아이를 낳은 결혼 후의 페리의 모습과 번갈아 가며 나온다. 이야기는 자신의 지갑 속에 숨겨 둔 대학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주인공 페리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옛날 사진을 통해 그녀는 감추고 싶던 과거의 회상으로 떠난다. 묻어 두고 싶은 사건으로부터 도망친 이후, 페리는 항상 자신의 내면에 숨겨 둔 여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페리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왔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내로서, 엄마로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 온 페리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다. 페리는 외면했던 과거를 당당하게 마주하고 자유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간다. 과거를 딛고 일어서는 페리의 모습은 수많은 '혼란스러운'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페리의 아빠 멘수르는 우울하고 어두운 생각을 멀리하는 방법을 페리에게 가르처 줄 수는 없지만 지울 수는 있다고 이야기한다.
"쓰고 나면 지워 버려. 믿음과 의심. 질문과 답.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알고 있는 것에 의문을 가져야 해. 절대 한 곳에 머물지 말아라. 세상에 네가 있던 곳이 아닌 곳에 발자취를 남겨 봐. 이븐 아라비의 '사랑의 카라반'이라고 있지? 그 카라반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 우리도 따라가는 거란다. 절대 한 곳에 정착하지 말아라, 뿌리를 내려서는 안 돼. 다 됐다거나 찾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단다. 어떤 소수자 집단이나 집단적 정체성, 종교 집단, 단체, 부족에도 속해서도 안 돼. 모두 널 잘못된 길로 이끌 것이고, 혼란에 빠트릴 거다. 넌 혼자가 되어라. 너 혼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가고 있다는 그 과정......."
페리는 이스탄불을 떠나 온 옥스퍼드 대학에서 쉬린과 모나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리고 페리는 자신의 집에서 신앙, 종교, 신과 같은 문제들이 항상 논란거리였고, 엄마 아빠가 너무나도 서로 반대 생각을 가지고 계셔서 아주르 교수의 세미나 수업을 듣는다. 아주르 교수는 선입견이 없는 사람, 우주의 소리와 색깔에 머리와 가슴이 열려 있는 사람들, 대답보다 질문을 선호하는 사람들, 여행자, 유목민의 영혼을 가진 사람, 항상 길을 찾는 사람들, 어떤 곳에도 도달할 수 없는,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만함이 없고, 자신의 세미나 수업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페리는 아주르 교수가 신과 삶, 믿음과 학문에 관해 이야기할 때, 풍요롭고 다른 길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날반트오올루 가족들 속에서 자라면서 갇혀 있었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길을 찾고 있었다. 페리는 오랫동안 엄마와 아빠의 다툼으로 슬프고 지쳐 있던 자신의 영혼이 아주르 옆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걸 알았다. 페리는 드러낼 수는 없어도, 아주르 교수에게 빠져 있었다.
아주르 교수는 페리에게 자신의 역할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약간의 믿음을 심어 주고, 믿는 사람에게 약간의 회의론을 심어 주어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주르 교수는 획일적인 곳에서는 철학도 예술도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종교인들은 비판적 사고와 회의적 질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계의 많은 학자는 믿음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죠. 나는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합니다. 나는 모든 감각이 깨어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멋자 문어처럼. 철학, 시, 예술, 과학... 이것들을 한 데 섞자는 거죠. 딜레마를 제거하자는 거예요. 우리 시대에 우리는 정체성과 규정, 구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신에 대한 철학에서 멀어진 겁니다. 그게 아니고, 우리가 모든 걸 잘못 알고 있다면?"
페리와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포이라즈가 자신이 준 자두를 먹고 질식사한 후, 아빠 멘수르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엄마 셀마가 이단 종파의 지도자를 찾아갈 만큼 독실한 무슬림이 되었다. 같은 비극이 두 사람을 정반대 방향으로 몰아넣고, 남편과 아내는 두 번 다시 화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페리는 부모님의 파탄 난 결혼 생활에 대한 책임이 진심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무감각. 이것이 페리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기억하지 않을 수만 있담린.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과거는 갈라진 틈 사이에서 스멀스멀 스며 나왔다. 그날 오후의 기억, 쌍둥이 동생의 유령은 어디를 가든 안개 속에서 그녀와 함께했다."
페리는 아주르 교수와 친구 쉬린의 관계를 질투하여 자살기도를 하고, 아주르 교수의 의혹에 관한 진실을 진술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페리의 행동은 때로는 수동적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는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수동적인 성격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평생 수동적이었다.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 질식사할 때도 충격 때문에 꼼짝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엄마 아빠가 싸울 때마다 그녀는 갈팡질팡했다. 쉬린과 모나가 싸우는 동안 그녀는 둘 다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끼어 있었다. 매번, 항상 경계에서...... 그녀의 영혼은 자신의 틀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브의 세 딸들>의 마지막은 초대받은 저택을 급습한 남자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옷장 속에 숨은 페리가 아주르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사랑도 사실 신앙과 같아요. 결과를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어도, 자신을 쏟아붓는 거죠. 이 세상의 많은 것이 실제로 신앙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책을 쓰는 것도,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는 것도,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도 말이죠. 이것들 모두 일종의 신앙과 같은 거죠. 사랑은 감정을 강하게 만들죠. 황홀경에 빠지게 돼요. 제한된 자신의 존재를 넘어 누군가와 연결되는 아름다움. 그러나 사람이 사랑 또는 신앙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모든 것이 독단적 신념이 돼 버려요. 사랑도 믿음도 과장되어서는 안 돼요. 어떤 것도 우상화해서는 안 돼는 거죠."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