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물었다 -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있느냐고
아나 아란치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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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물었다>는 완화의료 전문가인 저자 아나 아란치스가 죽음을 곁에 둔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보호자들을 지켜보며 느낀 성찰을 다룬 책이다. 아나 아란치스는 20여 년이 넘도록 삶과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봐우며, 2013년에 오래도록 금기시돼왔던 '죽음'이라는 주제를 의료 전문가의 시선으로 풀어낸 TEDx 강연이 큰 호응을 얻으며 이름을 알렸다. 이 책은 누군가의 마지막 시간을 돌보는 의사로서 저자가 경험한 삶과 죽음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완화의료의 현실에 대해 객관적이면서도 다정한 시선으로 전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지만 아무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죽음의 순간을 통해, 저자는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사는 삶을 택하지만 모두가 살아 있는 상태도 죽을 권리를 갖고 있다." 저자는 오늘의 삶이 어떻게 죽음의 모습으로 투영되는지 알려주면서, 남은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기회를 선사한다.

"이 책이 독자 여러분과 나를 만나게 해주었으며, 나는 의사로서 날마다 일터에서 배운 것들, 그리고 치열하게 존재하는 다른 인간들을 돌보는 인간으로서 깨달은 것들을 독자들과 모두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처음부터 꼭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인생의 일부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그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하며, 단지 육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행위로도 존재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 존재 안에서만 죽음은 끝이 아닐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죽음은 삶으로 이어지는 다리이다.

우리는 다수가 믿고 있는 '정상적인 것'을 뒤집어야만 한다."



저자는 임박한 죽음이 삶의 의미와의 만남을 앞당겨주기도 하지만, 그 만남을 체험할 시간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괴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완화의료는 헛된 치료의 중단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환자의 신체적 고통, 진행되는 증상, 그리고 심각한 불치병을 통제하기 위한 공격적 치료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의료진이 제공하는 확대된 돌봄이라는 실체적 현실도 포함한다. 저자는 환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으면서 겪는 정신적 고통은 매우 극심하며,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이 지닌 의미를 찾고 싶게 만든다고 말한다.

"나는 늘 의학이 심리학이라는 복잡한 영역에 비하면 쉽고, 심지어 지나치게 단순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신체 검진을 통해 환자의 거의 모든 장기들을 평가할 수 있다. 몇 가지 검사실 검사와 영상 검사만 있으면 환자의 생명 유지 과정이 얼마나 잘 기능하는지 매우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환자들을 아무리 관찰해도 그들이 어디에서 평화를 발견하는지, 얼마나 많은 죄책감이 혈관에서 콜레스테롤과 함께 흐르는지, 얼마나 큰 공포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외로움과 방치로 마음이 병들어 있어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재앙이나 비상 상황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병이 하루하루 진행되고 있는 환자들을 한 사람씩 관찰한다. 나는 노인의학 전문의이기에 환자들이 처음 노화의 여정에 들어설 때부터 돌봄을 시작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는데, 그건 엄청난 특권이다. 나는 유일한 방식으로 고통을 겪는 인간존재인 그들을 오랜 시간 지켜보며 돌봄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고, 늘 준비가 되어 있도록 노력한다. 지속적인 기술적, 과학적 배움과 인도적인 태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돌봄이 모두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러한 균형 없이는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저자는 사람들이 죽음에 가까워져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고통을 느끼면서 진실을 감지하는 진정한 안테나를 갖게 되는 것을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치 신탁을 전하는 사람들 같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안다. 자신의 본질에 직접적으로 닿게 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본질을 보는 능력을 얻는다. 저자는 우리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존엄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영웅은 죽음과의 만남을 피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심오한 지혜로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이들이 완화의료가 안락사나 죽음의 촉진을 지지한다고 여기지만 그건 엄청난 착각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안락사를 제공하지 않으며, 제대로 된 완화의료 수련을 받은 의사라면 안락사를 권고하거나 실행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환자에게 신체적, 정서적, 가족적, 사회적, 영적 안락에서 오는 웰빙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건강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과 조치를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고,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가질 가망도 없다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모든 면에서 존엄과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을 살아왔다면 죽음을 생애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죽음이 적당한 때에 찾아올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큰 야심을 갖고 완화의료를 수행한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넘어 아름다운 죽음을 유도하고 보조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저자는 완화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맗나다. 누군가가 고통받으며 죽어갈 때 그 사람 곁에 있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감이라고 불리는 재능이다. 저자는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기술로, 이는 완화의료를 하고자 하는 의료 전문가에게 가장 중요한 기술이 될 수 있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전문가가 완화의료를 제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 되기도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맹목적 공감의 위험은 당신이 타인의 입장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지녔는지 모른다면, 타인의 입장이 되었다가 자신의 입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고 말한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꿔놓을 수 있게 해주며, 그래서 공감을 넘어서 환자에게는 고통을 이해해 주고, 의미 있는 무언가로 바꿀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공감은 위험을 지니고 있지만 연민은 그렇지 않다. 연민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에 오염될 위험을 막아준다. 공감은 소진될 수 있지만 연민은 무궁무진하다. 공감은 이따금 맹목적이 되어 우리를 타인의 고통으로 인도하면서 스스로를 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연민의 경우 타인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우리 문화에는 성숙함과 진실성,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다해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한다. 저자는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린다면 실상 그것은 시간이 더 빨리 가도록, 그리하여 죽음이 더 빨리 찾아오도록 재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가 그 속도를 높이고 싶어 하든 낮추고 싶어 하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삶은 우리가 그 시간 동안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체험이다. 날이 저물기를, 주말을, 휴일을, 은퇴를 기다리며 삶을 보낸다면 죽음의 날이 더 빨리 오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은 일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을 사는 것'은 특정 순간이나 삶의 즐거움에 맞추어 켜고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다. 즐겁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는 100퍼센트의 시간을 산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지나간다. 삶을 날마다 일어나는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저자는 존재적 좀비와 같은 인간들을 비판한다. 폭력과 편견을 공유하고 고집하는 사회 안에서 내면의 불행을 외면한 채 어리석게도 외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다. 저자는 그들 모두는 벌거벗은 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회에 최악의 모습을 노출시키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서 부재하며, 아마도 그것이 죽음의 순간에 스스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삶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환상을 품고 무책임하게 살아간다. 진실함이나 선함, 아름다움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자신의 본질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 죽음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기를 피하는 사람들은 가구 없는 방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과 같다. 그들은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는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순진하게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죽음을 보지 않으면, 죽음도 나를 보지 않을 거야.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은 삶 자체에 대해서도 그런 잔꾀를 부린다. 그들은 쓰레기 같은 관계, 쓰레기 같은 직업, 쓰레기 같은 삶을 기어코 유지하면서 자신만 속이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쓰레기는 실체를 드러낸다. 악취를 풍기고, 불편을 초래하고, 병을 유발한다."

"자신의 삶에서의 부재는 변명이 불가능하다. 자신과 타인, 자연, 주위 세상, 그리고 각자가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존재의 상태여야 한다. 자신의 삶에서 살아 있지 않은 사람들과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여지가 없다. 잠시 환기하자면, 나는 진짜 죽은 자와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시체, 죽음에 대해 용감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 이미 인간성의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매장하고 목적 없이 떠도는 존재적 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건 육체적인 죽음뿐이다."

저자는 평생 일에만 매어 살게 되면 죽음을 앞두고 후회로 남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인생을 성취의 집함체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삶은 소유를 의미한다. 소유하고 축적하기 위해 미친 듯 일하며, 물질적인 것들만 모으는 게 아니라 상처와 위기까지 모은다. 그리하여 문제들을 포함한 많은 것들을 소유한다. 저자는 일에서 얻는 에어지도 삶에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나쁜 에너지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삶에서 얻어낸 것들을 온전히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잃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모든 존재적 상실, 그것이 하나의 관계든, 직업이든, 확신이든 모든 상징적 죽음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용서가 필요하고, 둘째,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좋은 점도 간과해선 안 되며, 셋째, 이제 끝나버린 그 시간에 당신이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저자는 상실의 수용은 계속되는 삶에서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애도자에게 고인이 의미로 충만한 삶을 남기고 떠났음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한다. 고인에게 배운 것들, 고인과 나눈 추억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저자는 애도자는 추억과 감정들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죽지만 오직 사랑만이 우리 안에서 불멸의 가치를 지닌다는 저자의 글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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