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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철학, 생각의 깊이를 더한다는 것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박제이 옮김 / 독개비 / 2022년 11월
평점 :

<그래서 철학, 생각의 깊이를 더한다는 것>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공동 환상론'을 바탕으로 대화, 생각, 일, 믿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들여다본 인문 도서이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아렌트, 요시모토는 하나같이 시대와 깊게 뒤섞여 살았다. 책상 앞에만 죽치고 앉아있기보다는 행동했다. 그것을 통해 다른 이들과 깊이 교류했다. 때로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면서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낸,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사상가다.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며 살아낸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철학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무엇인지 발견하도록 이끌어준다. 이 책을 통해 철학자가 도달한 곳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생각의 여정을 만나볼 수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소크라테스가 '진실'된 말은 '무작위'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지극히 평범한 단어로 이루어진 말이라는 소리다. 보통 우리는 무엇을 말할지 생각한 다음에 어떻게 말할지를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는 '무엇을'보다 못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무엇을'은 요약할 수 있지만, '어떻게'는 요악할 수 없고 치환 불가능하다. 요약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것 중에서 '진실'된 것을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며, 바로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라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미사여구'로 장식된 말은 누군가의 모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로 살면서 터득한 말로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무작위'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말고 방법은 없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서 있는 위치였다. 곧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오히려 '어떻게'가 정해지면 '무엇을'은 자연히 정해진다."
저자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지혜로 충만한 상태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무지의 지'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모르는 자신을 산다는 것은 조금 다른 영역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무지의 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성'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성은 누구나 대등하게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모두의 인간성 '상태'는 불완전하다. 누구나 발전하는 중인 불완전한 상태이기에 비로소 인간성을 기름으로써 인생의 깊이를 더하 수 있다. 그리고 불완전하다고 스스로 아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지혜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빨리 이해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현대인에게 데카르트의 <병법서설>에서 "어떤 사람은 타인이 20년이나 걸려서 생각한 모든 것을 고작 두어 마디 말을 듣고서는 하루 만에 다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머리가 좋으면 좋을수록 쉽게 틀릴 수 있고 진리를 파악하는 힘도 약해질 수 있다. 그들이 나의 원리라고 믿는 것을 토대로 삼아 터무니없는 철학을 만들어내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며, 또한 그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문장을 거듭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워야 할 점은 '빨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빨리 이해하려는 것은 예지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데카르트는 느낀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더욱 위험한 것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인에게는 수많은 것을 빨리 알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빨리 아는 것'보다는 '확실히 아는 것', '깊이 아는 것'이다. 곧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할 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일'과 무언가를 '사는 일'은 다르다고 말한다고 전한다. 나아가 무언가를 '배우는 일'과 '사는 일' 양쪽의 길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을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데카르트로부터 밝혀낸 것이다.
"공부는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그것에서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것 외에는 배울 수가 없다.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은, 결국 제 손으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배움이란 공부 바깥에서 자신이 만나야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리라. 가령 지금부터 내가 '사랑이란 이러한 것이다'라는 강의를 한다고 치자. 이때 내가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해 동서고금의 명저가 말하는 것을 소개하면 여러분은 그것에 관해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정한 사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설명으로 '사랑'에 관해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없다."
저자는 데카르트는 인간이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 할 때, 그것에 무척 어리석은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 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만 생각하다 보면 막상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어 '말'에서 멀어지고 만다. 저자는 우리는 자신의 언행이 진정 자신의 '영혼'을 갈고 닦기 위해 좋은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 자신을 바꾸라는 것 뿐이므로 누군가를 흉내 내기를 바라지 않으며, 이것을 하나의 계기로 자신과 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봄으로써 자신 안에 또 하나의 대화 주체를 발견하기 위한 책이다.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자신을 바꿔나가기 위한 책이다.(...)
자신 안에서 진정 우수한 타자를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가. 데카르트는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과 깊은 대화를 펼쳐나갔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책상 위에서 고찰하지 않았다. 마흔한 살까지 책상에서 떨어져 직업이 다양하고 신분이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여 <방법서설>이라는 책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뜻하는 '철학'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철학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개개인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대화하면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철학은 철학자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전제를 세우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통해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저자는 인간은 누구나 방황할 때 재빨리 답을 찾고 싶지만, 그러면 인간은 그 답에 다소 속이 있어도 그것을 들이키고 만다고 말한다. 저자는 철학적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목이 마르다고 해서 독을 마셔서는 안 되며, 그 목마름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어떤 문제를 진정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어느 특정한 사람의 이론을 궁극의 해답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재촉하는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철학의 전제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이때 아렌트는 단순히 해답처럼 보이는 것을 의심하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절대적인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개개인이 각자 사고의 깊이를 더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저자가 노동과 일의 근원적인 차이를 말하는 아렌트의 글을 소개하여 인상적이다. 아렌트는 "노동이란 인간 육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대응하는 활동력이다. 인간 육체는 자연스레 성장하여 신진대사를 한다. 그리고 결국 썩게 되는 이 과정은 노동에 의해 생명 과정에서 태어나 소비되는 생활의 필요물로 구석된다. 이때 노동의 인간적 조건은 생명 그 자체다. 일이란 인간 존재의 비자연성에 대응하는 활동력이다. 인간 존재는 종의 영원한 생명 순환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종의 생명 순환이 영원하다는 사실로 위안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은 모든 자연환경과 지극히 다른 '인공적' 세계를 만들어낸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아렌트는 노동은 생명 활동과 깊이 맺어진 행위라고 생각했고,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과 같은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한 이 책의 글귀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인이 항상 '삶'이라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미를 찾아내는 데서 아렌트의 철학은 출발한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에는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의 의미가 퇴색된 채 '일'하기를 강요받는다. 그가 말하는 '노동'을 잊은 채로 일의 평가에 따라 인간의 삶이나 존재를 판단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일 없는 노동은 성립하지만 노동 없는 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일 위에 노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직결된 노동 위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일'이 꽃피우는 것이다.
일의 현장에서는 노동력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그러나 이 말이야말로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다. 그가 말하는 노동은 그 사람만 행할 수 있다는 고유한 의미를 지닌 생명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고 노동력이라는 말은 노동을 대체 가능한 양적인 것으로 치환해버린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요시모토 다키아키의 <공동 환상론>에 대해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여 요시모토 다카아키로 끝내려 한 것은 그가 누구를 대하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강속구로 날리는 사람으로, 자신이 살아낸 모습과 실로 가깝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요시모토 다키아키는 개인의 내면에 깃든 인간을 신뢰하는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