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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ㅣ 흄세 에세이 1
알베르 카뮈 지음, 박해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결혼>은 마흔넷이란 역대 최연소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다. 이 책은 그가 쓴 소설, 희곡, 철학 산문, 시사평론 등을 통틀어 가장 서정성 짙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스물셋에서 스물넷이란 싱그러운 나이에 알제리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거닐면서 "향쑥 내음이 진동하는 폐허"와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폐허가 되어버리는 가혹한 세계를 거닐면서 역설적으로 발견해낸 인간과 자연의 합입을 감미로운 문장으로 기록해냈다. <결혼>은 '청년 카뮈'의 가장 생생한 목소리인 만큼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발산해내는 "순수한 관능과 감성", 그리고 "세계와 삶을 차분하게 관조하며 성찰하는 지성"이 동시에 돋보이는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파리 특파원, 논설워윈, 문학전문기자로 30여 년을 일하며 숱한 문학작품을 읽어온 박해현 번역자가 지금 시대에 맞는 단정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새롭게 번역을 하여 인상적이다.

카뮈는 '티파사에서의 결혼'에서 "이곳에서 나는 질서와 절제 따위는 남 줘버린다. 나를 송두리째 휘어잡는 것은 저 자연과 바다의 위대하고 자유분방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동부의 소도시 몽도비에서 태어난 카뮈는 시간이 날 때마다 북부의 해안 도시 티파사를 찾는다.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세워진 티파사는 수세기 동안 그 주인을 바꿔가며 다양한 문명의 자취를 고스란히 담은 유적지다. 카뮈는 티파사를 살고 증언하면 예술 작품은 뒤이어 올 것이고, 거기에 자유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세계와 나 사이의 사랑을 공유하기로 의식하고, 거기에 자긍심을 느꼈다는 카뮈의 글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의 잔해들은 다시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이 낸 광택을 지워버리면서 자연으로 회귀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제 아름다움에 자연스레 자긍심을 지니고 있고, 오늘날 세상은 그 자긍심이 여기저기서 배어 나오게 놔둔다. 그 세상 앞에서, 내가 삶의 환희에 전적으로 목을 매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있는데, 굳이 삶의 환희를 부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아니었고, 세계도 아니었다. 세계와 나 사이에 사랑이 태어나게 하는 저 조화와 침묵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제밀라의 바람'은 카뮈가 해발 900미터의 고지에 자리한 고대 로마의 도시 유적지인 제밀라를 둘러보고 쓴 에세이다. 카뮈는 나 자신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세계 속에 있음을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카뮈는 제밀라 어디에서건 내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죽음의 맛 같은 무언가를 뒤따라가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카뮈는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함으로써 우리와 세계를 분리하는 간격을 줄이게 되고, 영원히 잃어버린 그 세계의 승화된 이미지를 의식하면서 기쁨에 들뜨지도 않은 채 완전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갈 수가 없다. 종신형을 받고 갇힌 사람처럼, 그래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이 오늘과 유사하고, 다른 모든 앞날도 비슷함을 알고 있는 사람 같기도 하다. 자신의 현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앞날에 더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은 세상의 옆모습을 보기 위해 옆으로 한 걸음 옮겨야 한다. 젊은이는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젊은이는 죽음이나 무의 공포를 곱씹어본 적이 있더라도 죽음과 무의 관념을 반질반질하게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젊음이란 바로 그런 것, 죽음과의 혹독한 정면 대결이고, 태양을 사랑하는 동물의 육체적 공포,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통념과는 반대로, 적어도 이런 측면에서 청춘은 환상을 품지 않는다. 청춘은 환상을 수립할 시간도 경건함도 없다."
"숱한 인간과 사회가 이곳을 번갈아 차지했다. 정복자들은 저급한 문명으로 이 고장에 표식을 남겼다. 그들이 생각하는 위대함은 저열하고 우스꽝스러웠고, 정복한 땅의 면적으로 제국의 위대함을 가늠했다. 경이롭게도 정복자들이 세운 문명의 폐허가 바로 정복자들의 이상 자체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해 질 녁에 개선문 주위로 비둘기 때가 날아오를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이 해골 같은 도시가 정복과 야심의 표식을 하늘 속에는 새겨놓지 못했음이 뚜렷이 드러나니까. 이 세계는 늘 인간의 역사를 정복하고 만다. 제밀라가 산과 하늘과 침묵 사이로 던지는 저 커다란 돌의 외침. 거기에 새겨진 시를 나는 잘 안다. 자명성과 무덤덤, 요컨대 절망 혹은 아름다움의 참된 낯빛."
'알제의 여름'은 생후 8개월부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자 현재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에서 청년기를 보낸 카뮈가 자신의 '참된 고향'에 바치는 글이다. 아버지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하는 바람에 카뮈는 매우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알제의 여름'은 카뮈 청춘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글들이 눈길을 끈다.
"하루가 밤 속으로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이 찰나가 얼마나 은밀한 시호와 부름으로 가득 차 있기에 알제가 내 안에서 이토록 밀착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지방으로부터 잠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곳의 해 질 녘을 행복의 약속이나 되는 듯이 떠올린다."
"젊음의 징표는 요컨대 손쉽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재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음이란 무엇보다도 마구 방출되는 듯한 삶의 서두름이다."
"이 넘쳐나는 풍료 속에서 삶은 느닷없고, 까탈스럽고, 방만하고, 거대한 열정의 곡선을 그려간다. 일생은 쌓아가는 게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사숙고 또는 자기 계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땅과의 인연과 어떤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느끼는 것, 돌아보면 마음이 조화로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언제나 있음을 아는 것, 이만하면 벌써 여기에 한 사람이 평생 누리기엔 너무 많은 든든함이 모여 있다."
"한 인간이 되는 것은 늘 쉽지 않다. 순수한 인간이 되기는 더더욱 힘들다. 순수하다는 것은 이 세계와 맺은 혈연관계가 실감 나고, 피 끓는 소리가 오후 2시 태양의 숨찬 맥박과 하나가 되는 영혼의 고향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잘 알다시피, 사람은 항상 고향을 상실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고향을 알아본다. 자신의 삶이 팍팍한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그들을 부정하는 곳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굴고 싶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듯 보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를 부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이 생애에서 죽이는 일이다. 삶을 드높이는 모든 것은 동시에 삶의 부조리도 쑥쑥 키운다."
"인류의 죄악이 득실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맨 마지막에 가장 끔찍한 죄악인 희망을 꺼냈다. 나는 그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통념과는 달리 체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일이다."
'사막'은 카뮈의 고교 시절 은사인 철학자 장 그르니에에게 바치는 글이자 이탈리아 피렌체 여행기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제단화를 꿰뚫어 보며 종교와 시학이라는 포장을 벗겨내고 구체적이고 진실한 삶을 마주할 때의 기쁨을 그린다.
"꿈이 우리를 껴안으려고 할 때 우리는 꿈을 껴안을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을 위한 죽음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무조건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로렌초가 비록 장미꽃 나무를 곁에 두고 있더라도 땅에 묻힌 로미오보다 낫다. 그러하니 이 살아 있는 사랑의 축제 속에서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절묘한 순간에 영성은 도덕을 내쫓아버리고, 행복은 희망의 부재로부터 태어나고, 정신은 육체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는다. 모든 진리가 제 안에 쓴맛을 지니기 마련이라고 하면, 모든 부정이 긍정의 꽃 피어남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맞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를 관조함으로써 태어나는 이 희망 없는 사랑의 노래는 가장 효과적인 행동 규범을 형상화할 수도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엥서 무덤 밖으로 나와 부활하는 예수는 인간의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어떤 행복감도 얼굴에 그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오로지 거칠고 영혼이 없는 어떤 위대함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내 눈에는 살고자 하는 어떤 결의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현자는 백치처럼 말수가 적다. 그런 예수의 귀환이 나를 황홀하게 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