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는 세 노인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어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는 죽음이라는 상실 이후에 가족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친구나 지인이지만 떠난 사람의 상처를 제대로 알지 못한채, 각자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안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일상의 생활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떠난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과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여주어 인상적이다.
"체념. 어느 시기부터 아버지한테서 그게 느껴졌다. 혼자서 산속으로 이주해 버린 것도 그 체념과 관련 있었을 테고, 인간보다 고양이니 염소니 작은 새와 같은 동물에게 더 애정을 쏟았다.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과 이웃 간의 교류는 생각대로 되지 않은 적도 많았을 게 틀림없으련만 고집스럽게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요 자신이 최근 들어 그 체념이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딸에게 있어 자신이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아님을 깨닫고 있으며 아내에게 있어 이상적인 남편과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작년에 임원이 되었기에 정년이 연장되고 사무실도 건물 맨 위층으로 옮기게 되었지만 최근엔 일이라고 하면 회의와 회식 뿐이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고 나서 앞으로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고, 그래서 누나한테 날짜와 시간을 듣고도 장례 참석은 보이콧했다. 누나가 '치사코 씨'라고 부르는 외할머니를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까닭은 누나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이며 나는 누나에게 부채가 있다. 수많은 언쟁, 수많은 역성, 친할머니 집에서 누나는 명백히 부당한 꼴을 당했고 어린 나이었음에도 나는 그것을 알아 차리고 있었다. 알아차렸으면서 모르는 척했다. 분란이 잦았다. 새로운 생활에 순응하려 들지 않는 누나를 마음속 어딘가에서 비난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는 수 없이 가만히 앉아 열차 안의 사람들을 무심코 보고 있는데 전철을 타고 있을 대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살짝 걸터앉아 장신을 구부리듯이 웅크린 채 책을 봤다. 어딜 가든 늘 책을 갖고 다녔다. 식구들끼리 외출해도 마치 자신만 남 같은 얼굴을 하고서 이내 책을 펼쳤다. 오빠에게나 미도리에게나 자상한 아버지였고 미도리가 기억하는 한 아내에 대해서도 애정이 깊은 남편이었지만 그것들은 전부 집 안에서의 기억이며 인상이었다. 집 밖에서의 아버지를 나는 얼마만큼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이 술렁거렸다. 아버지를 자신들 가족의 것이라 여겼다."
"예를 들어 마당에 심은 구근 하나가 올해 처음 꽃을 피운 것을 발견했을 때라든지 슈퍼마켓에서 장을 다 보고 바깥에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을 때 혹은 우연히 탄 택시의 운전기사의 느낌이 좋지 않았을 때 갑자기 세상이 아버지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는 감각에 휩싸인다. 그 감각은 손에 닿을 듯이 생생하고 세상 그 자체와 맞먹을 만큼 거대해서 미도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러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쉬기가 힘들어지면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혼자서 종이 우산을 쓰고 가다>에서 죽음을 선택한 시노다 간지, 시세모리 츠토무, 미야시타 치사코라는 세 인물이 정확히 어떤 이유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나면 남아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세 가지 죽음이다. 에쿠니 가오리 작가는 세 노인이 함께 삶을 끝내기 위해 모이는 과정에서 죽음을 통해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독자에게 전한다.
"예전과 같다고 세 사람 다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간단히 옛날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는 아무도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많은 상실, 수많은 종언, 정말이지 자신들은 많은 죽음을 경험해 버렸다고 간지는 생각한다."
"나는 돈은 있지만, 돈이 있어도 갖고 싶은 게 없어져 버렸어.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제 하나도 없어."
"시노다 간지는 자신이 참으로 침착한 것 같다는 것에 희미한 슬픔을 느낀다. 공포든 망설임이든 자신을 이 세상에 붙들어 두려는 무언가가 아마도 마지막까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건 없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