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피부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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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피부>는 이현아 작가의 첫 책으로 유년과 여름, 우울과 고독에 관한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푸른 그림을 통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에디터로 일하며 써 내려간 그림일기에서 자신이 모으는 그림들이 유난히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이 책을 썼다. 대중에게 친숙한 에드워드 호퍼, 피에르 보나르를 비롯해 소설가 제임스 설터와 줌파 라히리의 책 표지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던컨 한나와 에이미 베넷을 비롯해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품은 세계 각국의 화가 스물네 명의 푸른 그림에서 위안을 담은 다양한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이 책은 '1장 유년, 2장 여름, 3장 우울, 4장 고독'이라는 4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나를 낚아챈 그림 속에는 공통된 색이 있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하나의 색이라기보다는 '푸른 기운'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

실제로 푸름은 손안에 쥘 수 없는 색이다. 다만 시선을 멀리, 그리고 높이 가져가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멀리 있는 산, 거리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늘과 바다, 그 너머의 수평선과 지평선. 그곳에 펼쳐진 푸름은 우리가 다가갈수록 뒤로 물러난다. 투명하게 사라진다. 푸름은 여기와 거기의 사이에, 그 거리 속에 존재하며, 바라보고 가까워지려는 시도 속에서만 유효하다."



저자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잠든 애너벨>을 보면서 루시안이 자식들과 그림을 통해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인생의 무언가를 주고받는다고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군가 바라봐줌으로써 또 누군가를 바라봄으로써 변화하는 경험, 한 사람의 진실을 한 겹 벗겨내거나 조심스럽게 덮어주는 경험이라는 두 사건이 모두 이 그림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에너벨은 낡은 시트 위에 태아처럼 웅크려 있다. 잠을 자는지, 울고 있는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굽은 어깨와 등에 피로가 먼지처럼 쌓여 있다. 이 그림이 유독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루시안이 평소에 그리는 적나라한 누드화와는 달리 '옷을 입고 있는''뒷모습'이라는 점에서였다. 그의 그림은 늘 폭로와 같았기에, 진실을 향해 돌진하는 자비 없는 맹수처럼 느껴졌기에, 이렇게 취약성을 드러내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불처럼 덮인 푸른 가운과 빠져나온 감정처럼 조심스럽게 놓인 발. 무엇이 덮여 있고 무엇이 드러나는지 바라본다. 어느 순간 나의 시선은 루시안과 겹친다. 그가 지금까지 캔버스 앞에서 자신을 지우고 인물에만 집중해 왔다면, 이 그림에서는 화가로서 지켜온 거리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만큼은 에너벨을 수많은 모델 중 한 명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다. 루시안은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지금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다.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다."



저자가 루치타 우르타도의 그림 <무제>에 관해 자신의 몸과 앞에 놓인 과일을 내려다보는, 1인칭의 시선에 붙틀리는 초상화의 기분을 닮았다고 이야기하여 흥미롭다. 우르타도는 평생 그림을 그렸지만 생활의 우위를 점한 건 늘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남편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우르타도는 소극적인 과거를 털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르타도는 <나는>으로 끝나는 제목의 시리즈의 기원을 돌아보며 "이것이 풍경이고, 세계이고, 당신의 집이고, 당신이 사는 곳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여름에 주운 단어 중 하나는 나신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나는 종종 그 단어를 즐기는 일을 좋아한다. 혼자이고, 외롭지도 않은, 남자 없는 여름. 창문을 연 뒤 옷을 훌훌 벗고 집 안을 거닌다. 타인의 시선이 부재할 때 몸은 가벼워진다. 그 행위에는 은밀한 자유로움이 깃든다. 신기한 일이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몸은 나에게서 고립되지 않는다. 혹은 그럴 때면 나에게 몸이 있음을, 살아 있음을, 여기 있음을 깨닫곤 한다.

이런 홀가분한 상태만큼 기분 좋은 일도 있다. 세상을 살갗으로 느낄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 몇 겹의 옷을 두르고 지내는 겨울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무언가에 닿는 피부는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동시에 피부에 닿는 대상의 상태도 알린다. 그 접촉면에서 대화가 일어난다. 무릎이나 종아리, 팔꿈치가 익숙한 물건들에 닿을 때 그 부피감과 무게감, 촉감과 온도는 평소 느끼던 것과는 깜짝 놀랄 만큼 다르다."

"밤, 부엌 식탁에서 자신의 나신을 그리는 중년의 여인을 떠올린다. 두 번의 이혼을 겪고 다섯 살 난 아들을 떠나보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낙관하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오랜 시간 알 수 없었던, 바로 그 여인. 그 앞에는 열매와 바구니와 아이 장난감과 담배와 불붙은 성냥이 있다. 자신이 탐하고, 자신을 방해하고, 자신이 되고 싶은 어떤 것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그림은 어떤 수식어도, 관계도, 평판도 걸치지 않고 나라는 존재로 걸어간 흔적처럼 보인다. 그의 나신은, 여름의 피부는 그렇게 세계와의 간격을 좁힌다."



저자는 스위스 화가 퀴노 아미에의 그림 <테이블에 앉은 안나 아미에>과 함께, 불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는 불안장애와 조울증 진단을 받은 후 두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가족에 대한 말하지 않았던 과거를 질문하는 의사에게 "병이 살짝 묻었네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잼을 만들며 달콤하게 방부된 불안을 보면 마음이 놓인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병이 살짝 묻었네요"를 "잼이 살짝 묻었네요"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스위스 화가 퀴노 아미에는 초상화와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그의 화풍에는 여러 가지 정의가 붙곤 한다. 상징주의, 클루아조니즘,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은 마치 배경에 묻힌 것처럼, 혹은 배경 속에서 인물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점묘 기법이다. 배경과 인물의 경계를 알 수 없고, 색이 뒤섞인 그의 점묘화는 일차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얼핏 보면 인물을 지우거나 망가트리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반복적인 시도 속에서도 그가 그린 초상화 속 얼굴은 기여이 살아남아 말을 건넨다. 세상에 얼룩덜룩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는 듯."



저자는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난파된 희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는 그림과 함께 뾰족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프리드리히는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저자는 이 그림에서 뾰족한 유빙이 섬처럼 얽힌 곳에서 난파한, 산산조각 났지만 침몰하지는 않는 배의 모습이 프리드리히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자연은 압도적인 공허와 가혹한 침묵을 만들고 운명의 불가해함 앞에 선 인간은 취약성과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화가 자신도 자연재해처럼 벌어지는 사건에 여러번 패배했디만, 그 앞에 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안개가 자욱한 산 위에 고독하게 선 방랑자보다 난파선에서 끝끝내 살아남으려는 선원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림 속 유빙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보면서 이소라나 프리드리히와 닮은 이들을 떠올린다.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모난 구석을 가진 사람들. 뽀족함을 연마하거나 닳지 않도록 애쓴 이들. 여전히 자신 안에서 미제인 감정을 지고 살아가는 어른들. 그 모습이 고집스럽고 세상과 불화하는 것처럼 여겨져도, 나만은 다르게 보고 싶다. 그들은 뭉툭해지기 쉬운 세상에 지지 않으려는 것이다.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주시하고, 영영 풀 수 없을지도 모를 엉킨 실을 끝내 잡아당기려고 한다. 나는 그런 예술가들이 좋아서, 이들이 지켜낸 뾰족함으로 무언가를 꿰뚫는 송곳을 만들었으면 해서, 그들에 대한 글을 계속 쓰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저자가 조지 클라우슨이 그린 <애도하는 젊은이>라는 제목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여 인상적이다. 애도에 대한 정신분석용어사전의 뜻은 "의미 있는 애정 대상을 상실한 후에 따라오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정신 과정. 애도는 주로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사별)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모든 의미 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일컫는다."이다. 저자는 이 그림의 여자가 그리고 있는 둥근 몸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모양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의미 있는 상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무엇을 상실한 걸까. 타인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상실 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

굳은살이 하나도 없는 발이, 다 자라지 않아 불그스름한 살이, 무방비한 목덜미가 촉촉하고 황량한 땅에 웅크리고 있다. 허술하게 엮인 나무 십자가 앞에서 눈을 가린 채. 처음에는 여자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울음에 따라오기 마련인 헐떡임이나 숨 가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십자가를 닻으로 삼아 자신의 상실 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한 인간이 보였다. 그는 자기만의 어둠을 느리고 고통스럽게 더듬어가고 있었다. 아무 보호막도 없이, 날 때와 같이 연약한 모습으로."



저자는 독일 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그림 <왼손에 두 송이 꽃을 든 자화상>, <노란 꽃을 꽂은 유리잔을 든 소녀>, <풍경 앞에서 꽃을 든 엘스베스>를 통해서 '들어 올림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는 파울라의 그림 속 인물은 자신과 대상이 조용하고 명확하게 '여기 있음'을 증명한다고 이야기한다. 노파와 꽃, 엄마와 아이, 소녀와 고양이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위계 없이 서로의 곁에 마치 두 명의 초상화인 것처럼 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저저는 이 '들어 올림'의 제스처는 나중에 올 여자들을 위해 파울라가 숨겨둔 쪽지가 아니었을까라고 말한다.

"백 년 전의 화가에게 닿기 위해 애쓰다 발견한 것은 그림 속 인물에게서 반복되는 하나의 제스처였다. 한 송이의 꽃을 들어 올리는 구빈원의 노파, 고양이와 염소를 들어 올리는 소년과 소녀, 젖먹이 아이를 들어 올리는 여인... 파울라의 그림 속 여인과 소녀들은 꽃과 아이와 동물을 '들어 올린다.'

우리는 손으로 무수히 많은 일을 한다. 종이에 살짝 베이기만 해도 생활은 삐걱거리기 일쑤다. 몸을 씻고, 도자기를 빚고, 대화하고, 밥을 짓고, 못을 박고... 손이 하는 일은 대체로 목적이 있지만, 파울라의 그림 속 손은 유용성과 거리가 멀다. 무언가를 '들어 올리는' 행위는 언뜻 봉헌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들어 올리는 대상은 제물이 아닌다. 더 높은 존재를 위해 바치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으로 본인을 치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꽃과 아이와 동물. 이들은 저마다의 몸으로 땅을 딛고 선, 우리와 같고 우리와 닮은 손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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