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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 작가를 따라 작품 현장을 걷다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2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은 소설과 여행을 사랑하는 작가 함정임의 세계문학기행을 담은 에세이다. 이 책에서 작가 함정임은 프루스트의 파리,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 카뮈의 루르마랭과 박완서의 아치울 마을, 한강과 박솔뫼의 광주까지 밤낮없이 작가들의 공간을 기웃거리며 불후의 작품을 써낸 그들을 평생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 누군가의 문학이 비롯되는 원형들, 삶이 문학이 되는 진실한 힘들을 발견하기 위해 작가 함정임은 작가와 작품이 영원히 살아 숨 쉬는 현장 속으로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떠나게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작가와 작품 주인공의 여로를 따라 현장에서 답사하고 쓴 스물네 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콩브레는 유년으로 통하는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의 통로이며, 현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직조한 서사의 원점, 회상의 성소라고 말한다. 프루스트가 일생을 바쳐 복원한 것은 과거의 삶만이 아니라 오늘의 일리에콩브레, 오늘의 파리라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가는 회상의 순례다. 현재의 시간에서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대상들은 모두 과거의 크고 작은 공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순간(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장면으로, 나아가 하나의 이야기로 창조된다. 콩브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공간을 이야기할 때면 제일 먼저 거론되는 장소다."
저자는 파트릭 모디아노와 W.G.제발트는 기억과 여행을 소설로 집요하게 탐구한 작가들이라고 말한다. 모디아노가 찾고자 하는 기억이란, 끊임없이 신분을 속이고 떠돌아야 했던 유대계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무명 영화배우인 어머니의 불안정한 생활로 유년의 불안과 결핍이 가져온 '편집증적 기억'의 세계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유년기 기억의 재구성이 아닌, 독일 점령 상황이 빚은 개인의 불행과 역사적 기억의 문제다. 이에 반해 파트릭 모디아노는 실종과 추적이라는 추리기법을 근간으로 인상파와 점묘법처럼 안갯속 파리의 수많은 거리를 호명하고 과거의 인물을 뒤쫓는 기억의 연금술을 펼쳐왔다. 저자는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와 제발트에 관해 이야기하며, 누군가는 기억이 원인이 되어 소설을 쓰고, 또 누군가는 여행이 원인이 되어 소설을 쓴다고 말한다. 기억이든 여행이든 소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사랑, 실험이라는 저자의 글이 흥미롭다.
"누군가 고독이 원인이 되어 소설을 쓰고, 누군가 권태가 원인이 되어 소설을 읽는다. 고독이든 권태든 하루하루 소서을 쓰고, 소설을 읽는 행위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구, 모험이다. 미지의 세계는 '기억'에, 모험은 '여행'에 관계된다. 세상 어떤 소설도 이 두 가지, 기억과 여행을 근간으로 삼지 않는 것은 없다."
"1945년 무렵 태생의 작가들, 프랑스의 파트릭 모디아노와 독일의 W.G.제발트의 소설들은 점령과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역사적 사실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끈질기게 개입하고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지워지거나 누락된 생의 기억을 추적하거나 추억하는 일은 두려움과 현기증을 동반한다. 핏줄에 관계된 모디아노의 기억은 두려움이고, 위대한 영혼들과의 극적인 만남에 관계된 제발트의 기억은 현기증 나는 환각의 장면들이자 감정들이다."
저자는 19세기 중반에 쓰인 <마담 보바리>가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더욱 왕성히 살아나는 것은 바로 작가 플로베르가 극도의 고통 속에 구현한 스타일의 창조와 함께 '보바리즘'과 '모방 욕망'이라는 현대인의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상력 과잉이 빚어낸 결과로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엠마는 몽유병자처럼 현실도 몽상도 아닌 환상 속을 표류한다. 이 책에서 소설 <마담 보바리>는 몽상이 자아낸 병적 환상인 '보바리즘'을 통해 낭만적 몽상과 삶의 서늘한 진실을 보여준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마담 보바리의 비극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에는 지금도 무수한 마담 보바리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사방에서 매 순간 그들의 욕망을 사로잡는 홈쇼핑 상품들이 즐비하다. 단 몇 초, 버튼만 누르면 욕망은 실현된다. 그러나 최신 유행으로 치장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한 사채 빚에 쫓기고 쫓기다가 결국 비소를 마시고 피를 토하며 처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마담 보바리의 최후는 낭만적 몽상과 삶의 서늘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21세기 도처에서 숨쉬는 마담 보바리들에게 19세기 작가가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아와 일상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시와 산문의 경계, 순간과 영원의 경계, 철학과 소설의 경계, 이 시간이면서 다른 어떤 새로운 시간의 경계에서 키냐르의 문장을 만난다고 말한다. 저자는 키냐르의 사유를 통과하면, 시간도, 종족도, 음악도, 문학도, 나라는 의식조차도 무가 되고, 새로운 시간, 새로운 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여 단순해진다고 이야기한다.
"키냐르의 글쓰기는 소설과 철학, 시와 소설의 경계에서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고는 한다. 그렇게 기울어진 끝에서 나는 매번 심연을 본다. 소설 속에서 철학의 심연을, 시 속에서 소설의 심연을, 그리고 이와 같은 흐름에 역하는 심연을 본다."
저자는 줌파 라히리와 리베카 솔닛에 관해 이야기하며, 글쓰기의 본질은 성찰과 구원에 있다고 말한다. 결핍과 과잉, 부조리와 부조화가 낳은 불행한 의식과 관계로부터의 해방, 이 여정에서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제3의 언어) 이야기를, 솔닛은 살구(회상의 매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존재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치유와 화해의 가능성을 퍼올리는 문장은 감동적이며, 이야기는 힘이 세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저자는 <흰>은 작가 한강이 언젠가는 써야 할 '어떤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작가가 선택한 장르는 이야기다. 저자는 '흰'에 바치는 비가의 흐름으로 작가는 목록으로서의 서사, 목록을 통한 애도 서사라는 새로운 소설형식을 선보였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작가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는 보통 소설 문법이 작동하듯, 인물의 시점과 인물들 간의 관계, 현재형 또는 과거형의 집중, 공간성 등의 통일을 이루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형태로 펼쳐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한강의 목록으로서의 애도 서사든, 박솔뫼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묘한 이야기든, 이들은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오래된 슬픔, 또는 자기 안팎에 떠도는 이름들을 제대로 호명해줌으로써, 신비로운 치유의 힘을 선사한다고 이야기한다. 치유한 가벼워지는 것, 곧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만드는 소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일 수 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붙잡고, 뜯어보고, 정의하려 했던 소설의 내용과 형식,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장르개념에서 훌쩍 벗어난, 소설 너머의 글쓰기 같은 것이다. 혼의 울음, 또는 울림, 자기 자신, 또는 누군가를 위한 추모와 애도."
책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은 어느 글은 태양의 저쪽에서, 또 어느 글은 밤의 이쪽에서 썼다는 작가 함정임의 에필로그 속에 담긴 글로 제목이 지어져 흥미롭다. 기다림 속에 삶이 흘러가듯이, 작가와 작품을 쫓아 지구를 돌고 돌면서 빚어진 함정임 작가의 글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유랑할 수 없는 세계 속 다양한 작가들과 작품이 자리한 장소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