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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엄마의 말뚝><나목><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 대한민국 필독서를 여럿 탄생시킨 작가 박완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째 되는 해를 맞이하여 그녀의 산문 660여 편을 모두 꼼꼼히 살펴보고 그중 베스트 35편을 선별한 에세이다.
이 책은 '1장 마음이 낸 길, 2장 꿈을 꿀 희망, 3장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 4장 사랑의 행로, 5장 환하고도 슬픈 얼굴, 6장 이왕이면 해피엔드'라는 6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박완서 작가는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고 이야기하는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믿음의 교감에 관한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 책에서 박완서 작가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바라는 사람 됨됨이에 관한 글이 눈길을 끈다. 박완서 작가는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 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 미술, 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를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박완서 작가는 묵은 사진첩의 기억의 창고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박완서 작가는 잊고 지내던 태산 같은 고통과 온갖 자질구레한 기쁨과 슬픔을 불러내어 자신을 부끄럽게도, 하염없게도 한 사진 한장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고통 속에서도 현실의 시점에서 글쓰기를 통해 또다른 빛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을 느낀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뻔히 보여서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당시에는 안 보이던 사물의 이중성과 명암, 비의가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이자 전율이다. 나라는 촉수는 바로 현실이라는 시점이 아닐가. 이미 지나간 영상을 불러내서 상상력의 입김을 불어넣고 남의 관심까지 끌고 싶은 기억에의 애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이자 한계 같은 것이 아닐가, 요즈음 문득문득 생각한다."
박완서 작가는 정직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작가의 할 일 이라는 것을 말한다. 박완서 작가는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독하게 열심히 써내려가는 것,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하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은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책에서 박완서 작가가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여 눈길을 끈다.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 연민할만한 인간성을 발굴해 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전쟁, 분단, 남편과 아들의 죽음 등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속을 살아내면서도 일상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인간성을 말한 작가 박완서의 진솔한 글을 만나볼 수 있는 책으로 인상적이다.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두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허락된다면 그때는 언제쯤일까. 10년 후쯤이 될까, 20년 후쯤이 될까, 몇 년 후라도 좋으니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싶다.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