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크리스마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3
쥬느비에브 브리작 지음, 조현실 옮김 / 열림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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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크리스마스>는 츨판사 열림원의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세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소설가이자 아동문학 작가인 쥬느비에브 브리삭의 소설이자 1996년 페미나상 수상작으로 인상적이다.

도시 전체가 휘황찬란해지는 크리스마스. 그 들뜬 분뒤기를 마치 전투하듯 통과해야만 하는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이 있다. 저명한 화가로서의 경력을 한순간에 내팽겨쳐버리고 남편과도 이혼한 채 도서관 사서로 쓸쓸히 살아가는 엄마 누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영악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고 있는 아들 으제니오. 찾아와줄 손님 하나 없이, 그들 둘이서만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겨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장난감 가게, 잡화점, 공원, 워터파크, 백화점 등을 쏘다니지만, 엄마의 좌절과 아들의 고통은 점점 더해간다. 마침내 친구의 별장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모자를 기다리는 것은, 속물적이고 괴팍한 친구의 가족들과 누크의 전 남편이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이것이 자신이 엄마로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픔을 주지 않는 엄마, 한없이 자애롭기만 한 엄마, 완벽한 엄마는 오로지 죽은 엄마밖에 없을 거라고. 사실 내가 아들이 잠드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그 정적이 순간, 모든 것이 파르르 떨리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어서다. 잠드는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때처럼, 난 이런 내 행동을 이해하려 애쓴다."

"으제니오가 세상에 나온 첫 순간을 생각했다. 진통으로 얼이 빠져 있던 내 얼굴 위로 의사가 아이를 거꾸로 흔들어댈 때, 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가야, 왜 좀 더 입이 크게 태어나지 못했니?' 난 행복의 기회와 입의 크기는 비례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새로 태어난 내 아기에겐 그런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더도 말고 꼭 앵두만 한 입. 처음 본 바보 그 순간부터 이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게 된 건 바로 그 자기마한 입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이에게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어 '류보비'라는 비밀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리라."

"집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난 언제나처럼, 우리 집 현관 매트 위에 뭔가가 놓여 있기를 기대했다. 차마 쳐다볼 용기는 없었지만, 장미와 유칼립투스 한 다발, 페르방슈 한 다발, 과일 바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로부터 날아온 전보, 아니면 미쳐버린 옛 애인이 보내온 작은 성냥갑 하나라도 놓여 있기를 원했다. 하얀 칠을 하고 뚜껑엔 검은 십자가를 그려 넣어, 아주 작은 관처럼 보이는 그런 성냥갑 말이다. 사실 이건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이미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으니까."



누크는 온 세상이 행복해하는 크리스마스로 인해서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하지만 누크는 주변에서 들리는 즐거워하기만 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단지 아이를 사랑하고자 하는 엄마 누크의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주변인들의 괴팍한 조언들은 누쿠의 불안과 우울을 증폭시킨다. 이 책에서 엄마로서의 역할에 대해 상심하는 누크와 고통이 심화되는 아들 으제니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아이가 있는 부모들에게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난 그걸 알았다. 그녀는 내가 무너져 내리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친구란 늘 그런 식이다. 주변 사람들이 차례로 실패하는 걸 지켜보면서 은근히 위안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친구도 없어지는 것이다. 친구가 없어졌다는 건 마침내, 아니 이미, 자신이 늙어버렸다는 가장 확실한 표시들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아픈 이들, 이미 죽은 이들 그리고 마지막 몸단장을 받는 이들 말고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각자 자기 울타리 안에 들어앉아 이미 예고된 파멸이 현실로 드러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어느 상황에서나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거짓 증거. 어떤 일도 사진 속의 장면처럼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사진을 기억한다. 오로지 사진만을. 사진은 행복한 과거를, 햇빛이 내리쬐는 휴가를, 포옹하고 있는 부부를, 관능의 쾌락으로 머리가 헝클어진 연인을, 해변에서 행복에 겨워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아이들을 담아낸다.

사진은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는 거짓말이다. 스탈린적인 발명품이랄까. 사진 속에는 지겨운 파티, 냉기가 도는 슈퍼마켓에서의 을씨년스러운 쇼핑, 숨 막히는 식사, 형제자매 간의 다툼, 치유할 수 없는 환멸, 이혼의 징후, 일상의 권태, 비 오는 날 같은 것들이 절대로 없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아쉬워할 가치도 없는 과거를 아쉬워하게 된다. 좋아한 적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는 순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라디오에선 누구든 즐거워하기만 할 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은 말실수나 엉뚱한 소리에 미친 듯이 웃어대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심각할 게 아무것도 없다. 진지한 척하려면 얼마든지 진지해 보일 수도 있다. 눈가에 어린 그늘도, 겁에 질린 눈도, 늙어가는 몰골도 전혀 보이지 않으니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들은 공놀이하듯 서로 생각들을 주고받는다. 생각이야말로 고뇌를 뿌리치는 최상의 무기다. 뭔지도 모르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두세 사람의 경쾌한 목소리들, 그건 일종의 놀이다. 주제에 접근하고 연속되는 말들 뒤에 감춰져 있는 것을 찾아내는 놀이, 호기심을 좇아가다보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크가 아들 으제니오와 전남편이 함께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삶의 잿빗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누쿠는 자신에게 남은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아들 으제니오를 전 남편에게 뺏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똑같은 잿빛을 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누크의 마지막 독백은 쓸쓸하게 혼자가 되어버린 그녀의 우울과 불안 슬픔이라는 감정의 깊이를 담아내는 것이 아닐까?

"거실 벽난로 앞에선 으제니오와 아이 아빠가 나이팅게일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현실에선 기쁨도 결국은 슬픔을 낳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견딜 수 없는 불안이 생겨난다. 우리 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작은 녹색 그림, 아담, 우리 카펫에 가위로 새겨넣은 미로, 우리가 맞춘 퍼즐들, 그리고 붉은 커튼. 영원히 잃고 마는 것인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끔 앞이 전혀 안 보일 때가 있다.

이제 더 이상 길을 그린 그림도, 길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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