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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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끝낼 수 없는 대화>는 화가를 꿈꾸었으나, 이제 성직자이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사학자인 장동훈 신부의 그림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그림을 이야기하지만, 미술보다는 역사와 사회, 종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저자의 다채롭고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이 빛을 발한다. 저자는 르네상스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명 작품에서부터 숨겨진 명작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증언과도 같은 여러 작가의 그림들인 세속화를 통해 거대한 자본시장의 바깥, 권력과 교회의 울타리 바깥, 시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그닐지고 소외된 자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책이 다루는 미술작품들 안에는 신이나 자연이 아닌, 인간이 존재한다. 즉위하는 황제, 총살당하는 황제, 성공한 혁명가, 실패한 혁명가, 작품을 주문한 의뢰인들, 어쩌다 모델로 찍힌 듯한 여자, 무심한 우리 이웃들, 세상의 빈자리에서 깜빡이는 고독한 사람들, 인류의 오늘을 장식하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성당과 성경 바깥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그 겉모습을 어루만질 수 있는 군상들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현대문명과 오늘의 사회에 관한 질문이 던져지고, 2부는 지금, 여기를 살아내야 하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조명하며, 3부는 상품처럼 소비되고 있는 종교와 교회의 내일을 묻고, 마지막 4부는 시대와 이념, 신념과 체제,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힘겹게 피워낸 예술가들의 성취를 담았다.

저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소개하며, 모든 것을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환원할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신화나 낭만만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은 존재할 이유, 삶의 가치와 같은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더 근본적인 것들의 상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기계문명의 도래는 자신만만히 '인간의 시대'를 열어젖혔지만, 인간은 실상 호퍼의 군상처럼 더 고독해지고 허무해졌다고 전한다. 이 책을 읽으며 호퍼 작품의 중심 주제는 '깃들지 못함'이라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흔히들 호퍼 작품의 중심 주제로 기다림과 고독을 꼽지만 내게 그것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깃들지 못함'이라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이다.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문명이라는 공간에 유폐된 인간은 과르디니의 표현대로 뿌리내릴 곳 없이 쉼 없이 부유할 뿐이다. 카페, 술집, 극장, 휴양지, 호텔 객실, 주유소처럼 모두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는 공간에 계류할 뿐인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들처럼."



이 책에서 저자가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의 대표작인 <제4계급>을 소개하여 흥미롭다.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에게 인간의 덩어리는 '무리'가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 새로운 계급이었다. 저자는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가 자신의 부인, 친구, 볼페도의 이웃, 노동을 통해 매일의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그림으로서, 신화와 성서에서, 이전의 세상에서 분명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이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올라선 것이라고 말한다.

"펠리차의 화면 속 확신에 찬 저 행진은 지금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공의회라는 이상을 통해 세상 안에, 세상과 함게, 세상을 위하여 살겠다고 약속한 교회는 또 얼마나 지어졌을까. 모두 멈추고 중단된 듯해도 분명한 것은 '당나귀'를 맞이할 시간들은 어김없이 지금도 어디선가 흐르고 쌓여간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이라는 그림을 소개하며 완전히 소진되어버려 누워 있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 속 처참한 주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르마와 전례로 설명되기 이전의 '인간' 예술,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종교 너모'에 있는 신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홀바인의 그림에서 사람들이 만났을, 그저 죽도록 사랑하다 종국에는 정말로 자신마저 잃어버린 이 육신은 각자의 정의를 부르짖는 신,구교 양편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하느님이라고 전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도 500년이 지났다. 루터의 개혁이 진정한 '개혁'이었는가와 같은 '구교'와 '신교' 사이에 논쟁을 일으킬 만한 주제들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전 우선 되어야 할 것이 있다.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에 담긴 저 극한의 사실적 기록처럼, 종교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우리가 속한 시대의 고통을 증언하고 동행하는 일이다. 수 세기의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일치'할 수 있는 길도 다만 여기에 있다. 분명 극한의 고통을 온몸에 새겨넣은 저 주검이 여전히 건네고자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기찻길>을 소개하여 눈길을 끈다. 아이는 등을 보인 채 수증기 가득한 선로를 내려다보고 있고 책을 읽던 여인은 화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저자는 누군가를 마중 나온 것인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인지 알 길이 없고, 제목 또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마네가 화면에 붙잡아 두고 싶었던 것은 철로가 아니라 그림 속 기차가 뿜어내는 증기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릴 찰나의 '분위기'였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현실을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길 포기하지 않았던 마네처럼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혼미한 내일이라는 '거대한 전환' 앞에 서 있는 세상과 교회가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형태와 이름의 초안을 포기할 용기, 그리고 늘 새롭고도 가장 오래된 궁극의 질문, 인간은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운다.

"모든 면에서 모호한 마네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그 무엇도 해명하거나 선언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모호함을 두고 마네 스스로가 자신의 해명이 사람들에게 혹여 하나의 '규범'이 되어 스스로 생각하길 포기하도록 만드는 '초안'이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혁신이 또 하나의 인습일 수 있다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직 확실한 한 가지는 그 역시 세상이 뒤집히는 혼돈의 시대를 헤쳐가던 여느 사람처럼 자신의 여정을 수도 없이 의심했을지언정 현실을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길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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