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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냉정과 열정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등을 쓴 일본 여성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2005년 단편 소설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가 리커버판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작가 에쿠니 가오리가 열일곱 살 여고생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독특한 시선으로 그녀낸 단편소설집으로 인상적이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의미를 규정할 수 없는 순간들과 소소한 경험들 속에서 자라나는 열일곱 살의 성장통을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일상적이면서도 세련된 화법으로 들려준다.
단편 소설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여자 치한을 만나지만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해 불감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손가락>, 정신에 금이 간 단짝 친구 때문에 슬퍼하는 기억을 담은 <초록 고양이>, 비만인 몸에 대해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몰래 일기에 독약을 처방하는 <사탕일기> 등이 담겨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의 첫번째 단편소설의 제목인 '손가락'에서 열입곱 살 여고생으로서 살아가는 기쿠코의 모습을 담담한 문체로 써내려가는 에쿠니 가오리의 문장들이 눈길을 끈다. 교복이라는 동일한 의복을 입는다는 것이 개인의 생활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글에 공감을 느낀다.
"여자 고등학교는 참 이상하다. 마음이 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먹하다. 교복 탓인지도 모르겠다. 교복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을 완벽하게 가려 준다. 학교 밖에서는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마치 한 집단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전철에서 자신을 만지던 40대 여성 치하루를 만나게 된 기쿠코는 그녀가 교실에 한 명 정도는 늘 있는 타입의 여고생 같다고 생각하며 친근함을 느낀다. 기쿠코는 남편과 별거 중인 치하루를 만나서 그녀의 집까지 따라가게 되고, 학교의 친구들보다 더 많은 공통점을 느낀다. 기쿠코는 치하루가 전철에서 자신을 만졌을 때 어렸을 때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거나 잠옷을 입혀 주었던 엄마 손의 감촉과 비슷한 정겨운 느낌을 받는다. 친절해서 사이좋은 부부로 알았던 부모님이 아빠가 전근을 가기 훨씬 전부터 각자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엄마가 낮에 우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빠와 관계가 서먹해지며 엄마의 감정에 더욱 몰입하는 딸 키쿠코는 엄마가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랬으며, 엄마의 더 깊은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불현듯,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와 헤어져서가 아니라, 그 시간이 끝난다는 것에. 나는 눈앞에 있는 고등학생들보다 그녀와 보다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에서 두 번째 단편 소설 <초록 고양이>는 정신이 무너져버린 친구 에미로 인해 슬퍼하는 기억을 담은 열입골 살 소녀 모에코의 이야기를 그렸다. 친구란 훨씬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러 명의 친구와 같이 어울려다니기 보다, 단짝 친구 에미와 가깝게 지내던 모에코는 에미의 정신병으로 인해서 에미가 반에서 외톨이가 되는 모습을 알게 된다. "둘이서만 붙어다니는 것은 건전하지 않다."며 모두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친구는 재산이기 때문에 많은 게 좋다는 엄마의 이야기에 모에코는 "'모두'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따돌릴 때 외에는."이라고 생각한다. "외톨이로 태어나 열대 우림 어딘가에 살고, 죽을 때까지 다른 생물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는" 보라색 눈의 초록 고양이가 되고 싶다는 에미의 말은 슬픔을 담고 있다. 학교 친구들이 다가오지 않으며, 원조 교제를 하는 '다카시 씨'라 불리는 여학생만이 에미를 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같은 슬픔을 공유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모에코는 에미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며 친구들이 에미를 외톨이로 만드는 과정을 바라보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절대로 친구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비 오는 날 에미의 우산을 쓰고 오는 '다카시 씨'는 적어도 에미를 더럽다거나 세균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문장은 혼자라고 느껴지는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희망의 불씨를 보여주여 눈길을 끈다.
""나는 초록 고양이가 되고 싶어. 다시 태어나면."
보라색 눈의 초록 고양이, 라고 말하고 에미는 꿈을 꾸듯 미소 지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그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 고양이는 외톨이로 태어나 열대 우림 어딘가에 살고, 죽을 때까지 다른 생물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아."
에미는 열대 우림을 어떤 류의 숲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의 세 번째 단편소설인 '천국의 맛'은 쇼핑을 하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엄마의 공허한 삶을 바라보는 열입곱 살 딸 유즈의 이야기를 담았다. 성장할 시간이 많은 자신과는 달리 엄마의 불행을 느끼며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슬픔을 이해하는 유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아주 슬픈 일이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에서 네 번째 단편소설 <사탕일기> 비만인 몸에 대해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몰래 일기에 독약을 처방하는 열입곱 살 '카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름에 너 같은 녀석이 옆에 있으면 정말 숨이 턱 막힐 것 같다."라고 말하는 카나의 아빠, "여자 씨름꾼도 아니고, 조금은 신경을 써야지."라고 이야기하는 엄마의 무심한 말들은 카나가 사탕일기로 독약을 처방하게 만든다.
"사탕은 독약. 지금은 그저 수첩에다 달아 놓을 뿐이지만.
파란 사탕은 가벼운 독, 가벼운 벌을 주기 위한 것이니까 아마도 미미한 두통과 구역질 정도. 검정 사탕은 독한 독, 죽음에 이르는 독이다. 지금까지 사탕일기를 쓰면서 몇 명이나 독살했는지 모른다. 한 명을 몇 번이나 죽인 적도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일단 죽은 후에 다시 산다.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일단 파괴한다는 것. 나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아 버렸다. 파괴하면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을.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여름휴가 때나 설날 때나 홀로 아파트에서 지내고,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에게 친구 대접 이나 받는 오니시 씨처럼.
여행은 파괴의 결과이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의 다섯 번째 단편소설 <비, 오이, 녹차>는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며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서른 여섯 살 시토 이모와 열입곱 살 조카 유코의 이야기를 담았다. <비, 오이, 녹차>는 비 오는 날과 찻주전자에 끓인 녹차, 싱그럽고 엷은 초록의 색을 띠고 언제나 냉장고에 있는 오이라는 세 가지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제목이 흥미롭다. 특히 <비, 오이, 녹차>는 이모와 조카의 관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이 눈길을 끈다.
"독신 생활이 자유롭고 편하기는 한데,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가출할 수 없다는 것.
“그렇잖아, 내가 가출을 해 봐, 그건 절대 가출일 수 없잖아. 돌아오면 여행인 거고, 돌아오지 않으면 이사잖아.”
이모는 가능성의 문제라고 말한다.(중략)
“내가 실종 신고 해 줄게. 그러니까 이모도 가출할 수 있어.”
이모가 정말 어린애처럼 가출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 가출을 하면 실종 신고를 하고 찾아내면 데리러 가 주리라.
이모가 말한 대로,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에서 여섯 번째 단편소설 <머리빗과 사인펜>은 '다카노 씨'로 불리며 원조교제를 하는 열일곱 살 '다카노 미요'의 이야기를 담았다. 미요의 가방에는 머리빗과 사이펜 뭉치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머리빗과 사인펜>에서 자신에게 아무도 다가올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미요의 담담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다.
""다들 나를 다카노 씨라고 불러."
언젠가 미요는 그렇게 말했다.
"아마 거리감이 있는 거겠지."
라는 말도.
"사실은 아무도 내게, 다가올 수가 없는 거겠지.""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는 열입곱 살이라는 시간을 지나온 어른들에게, 열입곱을 지나가고 있는 소녀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에쿠니 가오리 작가만의 독특하고 섬세한 문체가 인상적인 단편소설집으로 흥미롭다. 날카로운 감정들을 모두 포착해내는 청소년이라는 시기를 통과하는 소녀들이 담담한 마음으로 학교와 일상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펼쳐내는 과정들을 보여주는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여섯 편의 단편소설들은 각 단편 소설마다 교실 속 아이들이 각가 주인공이 되어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