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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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휴고 상, 네뷸러 상, 로커스 상 등 최고 권위의 장르문학상을 여러 차례 석권하고, 미국 문단에 끼친 공로로 전미 도서상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던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다. 르 귄이 예순의 나이를 목전에 두었던 1989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쳐 발표했던 강연용 원고, 에세이, 서평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듬해 휴고 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서평을 제외한 각각의 글은 주제에 따라 여성, 세계, 문학, 여행을 나타내는 네 가지 기호가 붙어 있는데, 서문에서는 그 의도를 "특정 경향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이 피해 가는 데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으려는 독자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위트 있게 밝히고 있다. 폐경, 유토피아, 여행기, <하늘의 물레> 공청회를 둘러싼 문학의 검열 문제, <스타워즈>에 관한 감상 등 밀접한 삶의 단면에서부터 SF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소재를 망라한다. 때로는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난해하고 추상적인 주제 속에서도 설득력 넘치고 우아한 문장들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르 귄의 사고실험에 동참하게 한다. 잔잔한 유머와 날카로운 분노가 곁들여진 폭넓은 주제의 글들은 소설만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르 귄 특유의 철학과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하고,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거듭나던 시기의 사유 과정을 보여 준다. 르 귄이 자신의 대표작인 어스시 연대기를 마법사 게드가 활약하는 3부작에서 완결하지 않고, 20년 만에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장편 <테하누>(1990)로 다시 이어지게 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자각의 기록이기도 하다.

'우주 노파'라는 제목의 글에서 르 귄은 폐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르 귄은 노년기는 처녀기의 회복이 아니라 세 번재이자 새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르 귄은 기꺼이 변화를 이뤄 내려는 여자는 마침내 스스로를 배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스스로를, 스스로의 세 번째 자아를, 노렬기를, 홀로 힘겹게 낳아야 한다는 르 귄의 글에 공감한다.

"몸이 폐경처럼 강렬한 변화 신호를 주는데도 변하지 않고 젊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분명 용감하다. 하지만 어리석기도 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노력이다."

'젠더(성별)가 필요한가? 다시 쓰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르 귄은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의미와 젠더의 의미를 정의하고 이해하기 위한 생각을 전한다. 르 귄은 이론가도 아니고, 정치 사상가나 활동가도, 사회학자도 아닌 소설가이기 때문에 <어둠의 왼손>이라는 SF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사유 과정을 보여준다. 르 귄은 이 책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양성적이라면, 남자와 여자가 사회 역할에 있어서 정말로 완벽하게 동등하다면,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동등하고 자유와 책임과 자존감 모두 동등하다면, 지금과 아주 다른 사회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둠의 왼손>에 담긴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고, 대안적인 관점에 마음을 열고 상상력을 확장하려 시도할 뿐이다. 하지만 르 귄의 말처럼 질문 던지기를 통해서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는 SF의 기능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SF의 핵심 기능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언어네 아직 가리킬 말이 없는 것을 은유하고, 상상으로 실험하기."

르 귄은 "서사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라는 글에서 서사는 언어의 핵심 기능으로, 기원상 문화의 산물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회에서 정상으로 기능하는 정신의 근본에 있는 공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설, 일반적으로 서사는, 주어진 사실에 대한 가장이나 왜곡이 아니라 선택지와 대안들을 제기하여 환경에 적극적으로 직면하는 과정이자, 현재 현실을 증명할 수 없는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연결하여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르 귄은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이라고 정의한 시간 방향성의 심미 각각을 이용하여 가능성들을 연결하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유용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과 존재를 허구라는 측면에서 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유롭다는 듯이 행동할 수가 없다라는 르 귄의 글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압도적인 현실의 무게로 이야기와 맞설 뿐 아니라, 이야기를 시곗바늘이나 심장 박동의 속도에 한정해 버린다. 서사는 과거라는 "다른 나라"에 스스로를 위치시켜야만, 그곳의 미래인 현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르 귄은 "산문과 시의 상호 관계"라는 글에서 자신에게는 시든 산문이든, 작문은 번역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만 끈질기게 남아있다고 말한다.

"저는 갈수록 글쓰기 행위 자체가 번역이라고, 적어도 다른 것보다는 번역에 가깝다고 느끼게 됐어요. 그러면 원본은, 원래의 텍스트는 뭐냐고요? 제게는 답이 없어요. 아마 아이디어들이 헤엄치는 깊은 바다 같은 원천이 원본이고, 작가는 말이라는 그물로 그 아이디어를 잡아서 반짜깅는 모습 그대로 배에 던져 넣는 거겠죠......"

이 책에 실린,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던 밀스 컬리지 졸업생들을 위해 했던 르 귄의 "왼손잡이를 위한 졸업식 연설"은 역대 미국 명사들의 명연설을 모은 사이트 아메리칸 레토릭 최고의 연설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전 여러분의 성공을 기원하지 않아요.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전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러분은 인간이기에, 실패를 겪을 거예요. 실망, 부당함, 배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을 거예요.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소유하기 위해 일하다가 어느 순간 소유당하고 있음을 알게 될 거예요. 이미 경험했다는 걸 알지만, 여러분은 앞으로도 어두운 곳에서 홀로 두려움에 질리게 될 거예요.

저는 여러분이, 나의 자매이자 딸들, 형제이자 아들들 모두가 그곳, 그 어두운 곳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합리주의 성공 문화가 부정하며 유배지라고,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이질적이라고 하는 그곳에서도 살 수 있기를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여자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죄수로 살거나 정신병질적인 사회 체계에 합의한 포로로 살지 않고 그곳의 원래 주민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곳에 편안히 자리 잡고, 그곳에 집을 두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기만의 방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그곳에서 예술이든 과학이든 공학이든 회사 경영이든 침대 밑 청소든 뭐든 간에 잘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고, 혹시 사람들이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열등한 직업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꺼지라고 말하고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아 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정복할 필요도, 정복당할 필요도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결코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행사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실패하고, 패배하고, 고통에 사로잡히고, 어둠 속에 놓일 때면 부디 어둠이야말로 여러분의 나라이며 여러분이 사는 곳이고, 어떤 전쟁도 치른 적 없고 어떤 전쟁에도 이긴 적 없으며 오직 미래만 있는 곳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뿌리는 어둠 속에 있어요. 땅이 우리의 나라예요. 왜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대신 위를 올려다보며 축복을 구했을까요? 우리의 희망은 아래에 있어요. 궤도를 도는 감시 위성과 무기들이 가득한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내려다보며 살아온 땅에 있어요.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어요. 눈을 멀게 하는 빛이 아니라 영양분을 공급하는 어둠에,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키우는 곳에 있어요."

이 책에서 르 귄이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시나요?"라는 글에서 낭독이나 강연 후의 청중들의 질문에 관한 고찰을 이야기한 글이 흥미롭다. 르 귄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체계적으로 반복해서 오랫동안 훈련해야만 소설 쓰기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르 귄은 심상은 상상력에서 일어나고, 상상력이 생각하는 정신과 감각하는 몸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이야기한다. 독자는 읽는 동안 이야기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고 그 속에 빨려 들어간다. 그 심상들 속에, 그 상상 속에 들어간다. 르 귄은 읽히지 않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며, 소설을 읽는 독자가 소설을 살아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낸다고 전한다.

"일단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작가는 그 성스러운 고독을 버리고 작업 전체가 연행이었다는 사실, 이왕이면 좋은 연행이면 좋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작가인 '내'가 내 작품을 다시 읽고, 진정하고 앉아서 다시 생각하고, 고친 다음이라면 독자에 대해 의식하고 또 내가 독자와 협업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 적절할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사실 '나'는 신념을 갖고 그 미지의, 어쩌면 다시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친애하는 나의 독자들이 존재하리라 선언해야 할지도 모른다. 창작 시간의 아름다운 오만에서 벗어나 명석하고 예리한 자의식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글이 내가 생각한 대로를 말하나? 내가 생각한 것을 전부 말하나? 바로 이 단계에서 작가인 나는 작품 속에 나타난 대로, 독자들과 나의 관계가 지닌 본질을 물어야 할지 모른다. 내가 독자들을 밀어내고 있나, 조종하고 있나, 가르치려 드나, 독자들에게 과시하고 있나? 내가 독자들을 벌하고 있나? 내가 그동안 마음에 축적한 독을 버릴 쓰레기장으로 독자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독자들이 믿으면 좋을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 아닌가? 내가 독자들 주위를 빙빙 돌고 있나? 독자들이 그걸 즐길까? 내가 겁을 주고 있나? 그럴 의도는 있었고? 내가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흥미를 끌도록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독자들에게 최면을 걸고 있나? 내가 독자들이 나와 함께 작업하도록 작품을 주고, 유혹하고, 초대하고, 끌어들이고 있나? 나의 상상을 완성하는 바로 그 독자가 되어 달라고?"

르 귄은 "시어도라", "여자 어부의 딸"이라는 글에서 남편에 비해 존재감이 가려져 있던 어머니 '시어도라'에 관한 이야기를 건낸다. 르 귄의 어머니 시어도라는 네 아이를 기르고 결혼시킨 후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50대 중반에야 펜을 들었다.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며 여성 예술가의 복합적인 삶에 대해 조명한 르 귄의 글은 큰 울림을 준다.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은 시어도라 크라코프였고, 첫 결혼 후에는 시어도라 브라운이었어요. 어머니가 책을 쓸 때 쓴 이름은 두 번째 결혼하고 얻은 이름 시어도라 크로버였죠. 세 번째 결혼 후의 이름은 시어도라 퀸이었어요. 이렇게 여러 이름을 갖는 일은 남자에게는 일어나지 않죠. 불편하지만, 그 성가진 현상 자체가 여자 작가란 '저자'라는 단순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책임을 갖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글쓰기인 다중적이고 복잡한 존재 과정이라는 점을 밝혀 주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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