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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음 / 샘터사 / 2020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난데없는 퇴사’에서 시작된 ‘난데없는 도스토옙스키 탐독기’를 담은 소설가 도제희의 신간 에세이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며 삶을 추스른 작가가 전하는 고전의 힘과 매력, 위로와 유머를 만나볼 수 있다.
"이 글은 내가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다시 읽으며 불안정한 시기를 되돌아본 기록이며, 왜 나는 여전히 삶에 미성숙한지를 점검해 본 사사로운 글이다. 동시에, 불안정해서 자신이 불완전하게 느껴지는 청장년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만한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프리랜서도 일하면서 작업비 지급을 계속 미루는 업체에 화가 나 내용증면을 보내겠다고 하는 등 어리석었지만 솔직하고 선명했던 자신의 사연을 고백한다. 저자는 당장은 미래를 알기 어려우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일단 발현해 보고 그 뒤의 자괴감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어리석으면 어리석을수록 문제에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법이니까. 어리석을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말이지. 어리석음은 간결하면서도 결코 교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지성은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꼬리를 잘 감추지. 지성은 비열하지만, 어리석음은 솔직하고 정직하잖니. 나는 상태를 나의 절망으로까지 몰고 갔으니 어리석게 보일수록 내게는 더욱 도움이 되겠지." -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에서
저자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세입자로서 억울한 누명을 쓴 자신의 사연을 전한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40대 중년 마까르가 타인에게 모함과 멸시를 받은 이유는 조용하고 착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가난해서였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정당한 대가를 치른 자신의 방에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안았단 사실은 절대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였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도덕이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제게는 제가 먹을 빵도 있습니다. 사실 평범한 빵 한 조각이지만, 가끔은 말라 비틀어진 빵 한 조각이지만, 제 노동의 대가로 구한 빵입니다. 먹는 데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는 저만의 빵이란 말입니다." -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어제도, 오늘도 많은 세입자가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초라한 공간에서 남루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닭장 같은 원룸에서 힘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지하의 습한 공기를 견디고, 옥탑방의 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불안한 앞날 걱정에 시름에 빠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방은 당신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당신만의 방입니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미성년>에서 돈 자체가 아니라 돈으로 얻어지는 것들, 궁극적으로는 '내적 안정이 깃든 인식', '가장 완전한 의미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돌고루끼의 이야기를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미성년>에서 하인 신분의 마까르가 진정한 품위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내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 내게 필요한 것은 강한 힘으로 얻어지는 것, 강한 힘 없이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독하지만 내적인 안정이 깃든 인식이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 인간이 그토록 얻으려고 힘쓰는, 가장 완전한 의미의 자유의 정의인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미성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러한 공손한 태도였어. (...) 그의 흠잡을 데 없는 그런 태도는 오만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 그 정도가 되면 어떠한 처지에 있든, 어떠한 운명에 처하든,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흔들림 없는 확신과 같은 신념이 생길 것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것으로, 진정한 품위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귀한 것이지." - 도스토옙스키 <미성년> 중에서
"나는 자신만의 소박한 일상을 잘 지켜 나가면서도 품위있고, 지적이며, 편안하고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 이를 몇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내적 자산을 비교적 쉬이 갖출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보다 대단해 보이고, 그래서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질투하고 부러워한다. 그렇게 부러워하다 보면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니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은 어쩌면 틀렸다. 부러우면 이기는 건지도 모른다."
저자는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등장하는 레프 니꼴라예비치 미쉬낀 공작은 단숨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도스토옙스키 소설 주인공들과 달리 새로운 존재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백치>의 미쉬낀 공작처럼 어떤 면모든 특출하다면 그건 타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그 면모가 천진함과 솔직함 같은 긍정적인 조합이라면 상대의 마음은 절로 움직인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용기라는 솔직함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잘 알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솔직함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두는 것이다.
"무언가 숨기거나 꾸밀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정신 상태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럴 수 있다는 건 열등감을 느끼지도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는 뜻일 텐데,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 내적 힘을 어떻게 갖추게 되었을까?"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다양한 소설들을 저자의 삶과 연관지어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 에세이로 인상적이다.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안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고민하는 다양한 삶의 질문들을 만나고 각자의 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