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의자에 앉아 총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할머니의 시선이 담긴 강렬한 표지가 호기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100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여성의 굴곡진 삶을 살아온 102살 할머니가 루처 총을 든 사연은 무엇일까? 이 책은 소설가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 감독인 '브누아 필리퐁'이라는 남성 작가가 써내려간 페미니즘 소설로 독자들을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삶의 역사와 독보적인 블랙코미디의 세계로 인도한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탕! 탕! 베르트는 총을 다시 장전했다."라는 글귀로 시작하며 독자들을 호기심의 눈으로 초대한다. 이후 경찰인 벤투라 반장은 경찰들에게 총을 쏘아댄 이유로 체포된 할머니 베르트를 상대로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하고, 주인공인 102살 할머니 베르트는 벤트라 반장에게 루거 총을 사용하여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위협했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 책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우월한 남성의식으로 둘러싸인 남자들과 결혼하며 그들을 베르트만의 방식으로 제거하는 과정들이 인상적이다. 베르트는 아문 상처 속으로 고통과 상처를 헤집는 과정에서조차 지난한 삶의 변곡점들을 지나온 여성만이 내뱉을 수 있는 유머를 독자에게 선사하며 통쾌한 이야기의 서사를 풀어낸다.


베르트는 1914년 7월 11일 프랑스 남동부의 생플루르 주변에 위치한 오베르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베르트의 부친은 갓 태어난 딸을 버린 채 조국을 지키러 떠났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베르트의 모친은 남자가 부재한 가정에서 딸을 키웠으나 빛을 잃고 무기력과 공허 속에 묻혀 시들어갔다.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한 가부장의 역사를 지나온 베르트는 100살이 넘은 나이로 삶의 끝을 달려가지만 유쾌한 농담을 잃지 않는 여성이었다. 루거 총은 나치 친위대가 리통이라는 소년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권위의 상징이였으며, 베르트에게 루거 총이란 남성의 억압과 위협으로부터 혼자였고 여성이었던 자신을 지켜준 무기였다.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나간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 베르트의 할머니는 그녀에게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를 잃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베르트의 할머니는 따뜻한 집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남자 뤼시엥과 결혼했던 베르트의 실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베르트는 가부장적인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난 생존자였으며 폭력과 폭언이라는 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고자하는 힘을 얻은 후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몸과 영혼을 짓밟은 남편 뤼시엥을 직접 처단한 베르트가 느꼈던 감정은 해방감이었다.


베르트의 할머니는 베르트가 어린 시절 남자들이 베르트 자신을 절대 우습게 보도록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베르트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고통을 일삼는 남성들을 만나면서 남자들이 여성을 지배하도록 놔둬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혜를 떠올린다. 베르트의 할머니는 베르트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인물이었다.


"나의 귀여운 베르트, 안 그럴 수 있다면야 가장 좋겠지만, 살다 보면 남자들한테 네가 그들보다 더 강하다는 걸 알려줘야 할 때도 있을 거야."


아이를 낳지 못했던 베르트는 재혼한 남편 루이지가 임신한 애인이 있다는 폭탄같은 말을 듣는다. 베르트는 사랑하는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접합하고자 했으나 지난 2년간의 분노를 그에게 쏟아냈고 고통을 멈추기 위해 누군가는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르트는 생명을 주지는 못하나, 죽음을 주는 데는 뛰어났다. 베르트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가 매일 아내를 때리는 남편보다 더 비난받던 시대를 살아왔고 여자라는 이유로 일상을 폭력과 상처로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감내해야했다.


"너나 다른 경찰, 네가 죽고 못 사는 그 헌법을 지키는 모든 자들, 정작 행동해야 할 땐 눈을 씻고 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어. 오래오래 천천히 죽이는 건 살인으로 치지들 않지.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하지 않아......"


베르트는 남성의 위협을 벗어나 잠잠한 삶이 이어지도록 루거 총을 손이 닿는 곳에 간직했다. 뿐만 아니라 베르트는 전 남편인 뤼시엥의 잡화점을 운영하며 골동품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페미니스트 작품들을 읽기 시작하고 문학 속에서 친구들을 찾았다. 베르트는 여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남성과 차별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인간은 성에 다라 좌우되는 존재가 아닌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며 존중받아야 하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남성 우위라는, 자신에게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 늘 혼자였던 베르트는 적확한 단어들로 남성의 억압을 고발하는 이 박식한 여성들의 문장 속에서 자신은 남성의 억압에 맞서 문자 그대로 남성들을 박멸하는 편을 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르트에겐 필력이 없었다. 그녀에겐 탄환뿐이었다. 따라서 이 작가들의 논리가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다. 베르트는 이 페미니즘 작품들 속에 파묻혀 캉탈 구석의 작은 시골집에서 더 이상 고립감을 느끼지 않았고, 여자일 수 있고 동시에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뮤즈가 되기를 원하던 베르트에게 청혼한 화가 노르베르는 돈을 벌지 않고 베르트의 생활력에 기대여 살아가는 남성이었다.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예술에만 심취해 있는 노르베르는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원하는 아내 베르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베르트는 남성 우월주의에 갇혀 있는 노르베르에게 루거 총을 장전한 후 지하실에 땅을 파고 묻었다.


"은행에 계좌를 트고 자기 돈을 자기가 쓰려고 해도 남편의 동의가 필수적인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게 발목의 족쇄가 아니면 뭐야? 투표권을 얻기 위해 애걸복걸해야 했던 건, 그건 자유야? 바지를 입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건,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예술가라고 해서 꼭 바보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베르트는 어머니가 되지는 못하지만, 너무 일찍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은 여성들을 도왔다. 베르트는 날카로운 뜨개바늘과 기술로 어린 나이에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의 몸에서 능숙하게 태아를 제거했다. 베르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임신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임산부의 몸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수호천사였던 천사 제거자였든, 베르트는 여자들이 종교적 상징물로 그녀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도움과 사랑이 필요했고, 베르트는 그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삽으로 퍼줄 수도 있었다."


벤트라 반장은 살인을 자백하는 베르트 할머니를 통해 실패한 자신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본다. 벤트라의 세 번째 결혼은 실패했다. 그는 사랑하는 것, 지속적인 애정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벤트라는 베르트 할머니를 심판하는 대신 여성이라는 성을 뛰어넘어 삶을 대하는 그녀의 강인한 태도에 감화한다.


"그래, 난 그들을 죽였어. 사실이야. 그래도 난 나한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아니란 말이지. 이 부분에서 우리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구나. 너도 어쩔 수 없이 세 번 연속 실패를 했고, 실패하고도 또 도돌이표잖니. 세 번 이혼하나, 세 번 과부가 되나, 결과는 매한가지야. 너도 나처럼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거잖아."


베르트가 일생에 사랑한 사람은 단 사람 흑인 루터뿐이었다. 하지만 베르트는 나치 친위대에게 숨진 소년 리통의 죽음의 현장을 바라본 여동생 로즈를 집으로 데려가 치유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로즈의 아버지 튈리에는 베르트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며 레옹, 랑비냑과 함께 자신들의 구역이라 여긴 마을에 들어온 흑인 루터를 조롱하며 살해했다. 연인 루터를 살해한 세 명의 악인의 썩은 영혼을 루거총으로 처단하며 자신은 끝까지 생을 살아낼 것이라고 말했던 베르트의 오열을 바라보며 연인을 잃은 슬픔과 생의 의지를 다지는 그녀의 눈빛이 떠오른다.


"베르트는 새로 갈아엎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땅에 한 손을 얹었다.

묵념을 했다.

마당의 나무 밑에서.

그녀의 호흡은 차분했다. 평온해지진 않았으나, 분노는 사라졌다. 고양이의 두 눈이 어둠을 꿰뚫었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살금 살금 다가오더니,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경건하게 앉아 멀리서 그녀를 응시했다."


"베르트는 루커가 죽은 뒤로 호주머니 속에 소중하게 간직한 십자가상을 꺼냈다. 상아 십자가였다. 경찰은 가택 수색을 하며 노인을 속칭 옛쟁이로 상상했으나 관련 상품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 십자가, 그녀는 이것을 전리품처럼 몸에 지녔다. 인디언이 굴복시킨 적의 해골을 몸에 전시하고 다니듯 그녀도 목에 걸고 싶었으나 혹여 문제가 될까 두려워 보이지 않게 간직했다. 이제 선고를 받은 이상, 드러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목걸이를 여전사로서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던 할머니 베르트는 벤트라가 감옥에서라도 가끔 자신을 찾아와 생의 기쁨이라는 선물이 전해주기를 부탁했다. 베르트의 집이 불타오르고 불길이 온 마을을 환히 밝히며 베르트는 영원한 잠과 해방을 마주했다. 102살 노인인 베르트는 갈색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과거를 모두 경찰인 벤트라에게 이야기했으며, 검찰은 자백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베르트의 인생 이야기였다. 베르트는 죽음에 이르는 길목에서 삶의 진실을 토해내며 누군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랬던 것이 아니었을까?


"수사관은 살인자를 부둥켜안는 것이 규칙에 위배되는 것인지 자문했다. 이어서 그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두 팔을 벌렸다. 베르트가 움찍 뒤로 물러났다. 남성의 접근에 대한 오랜 관성. 그녀는 정신을 추수른 뒤, 이 마지막 선물을 받아들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받아본 가장 아름다운 선물. 그녀는 수사관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으며 얼굴을 비볐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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