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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ㅣ 걸 클래식 컬렉션 1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고정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평점 :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1980년대 빨강머리 앤이라는 애니메이션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특색없고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온종일 재잘대며 풍부한 감정을 가진 빨강머리 소녀 앤이 신기했다.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는 아이, 희노애락이 닥치는 순간마다 강렬한 감정과 반짝이는 상상력을 입으로 내뱉는 앤은 웅크리던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은 빨강머리가 컴플렉스인 열한 살 고아 소녀 '앤 셜리'가 에이번리 그린게이블스에 사는 매슈와 마릴라 남매의 집에 들어오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빨강머리 앤>은 실제로 프린스에드워드섬에서 태어나 두 살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책을 읽고 상상을 하는 시간이 많았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자전적 삶이 투영된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앤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상상력에 생기를 입히며 기쁨과 흥미를 발견한다. 호기심으로 가득찬 앤의 세상은 보물상자와 같다. 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환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앤은 고통과 슬픔, 상처마저도 상상의 힘으로 극복한다. 앤은 내면의 어두운 감정을 마주했을 때 비극적인 현실을 더 나은 상상의 장소로 초대한다. 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인 상상하는 힘을 통해 다채로운 무지개와 같은 세상을 마주한다.
"알아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하면 정말 짜릿하지 않나요? 살아 있다는 게 기뻐져요. 세상이 너무 흥미로우니까요. 우리가 모든 걸 안다면 절반도 흥미롭지 않을 거예요. 상상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제가 저 나무들의 꼭대기 바람이라고 상상하겠어요. 나무들이 지겨워지면, 여기 고사리들 틈에서 부드럽게 물결치는 걸 상상할래요. 그런 다음에는 린드 아주머니네 정원으로 날아가서 꽃들을 춤추게 하겠어요. 그다음에는 클로버 들판으로 날아갈래요. 그리고 영롱한 물빛 호수로 가서 아른거리는 물결을 일으키는 거예요. 바람은 상상할 게 너무 많아요!"
"기차에 탔을 때 사람들이 다 저를 보고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냥 제가 아름다운 하늘색 실크 원피스를 입었다고 상상했어요. 상상을 하려면 진짜 좋은 걸 상상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리고 꽃과 깃털로 장식한 커다란 모자에 금시계를 찼고 장갑과 구두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바로 기분이 좋아져서 이 섬까지 오는 길이 아주 즐거웠죠."
온통 거리가 회색빛으로 보이는 시기가 있다.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울때 주변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온기가 없이 먼지가 쌓인 방처럼 관심이 사라진 대상은 썩어서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빨강머리 앤>의 주인공 소녀 앤은 꽃과 나무, 길에 이름을 지어줌으로서, 세상 모든 것을 마음을 지닌 대상으로 바라본다. 앤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물건과 풍경들도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하나의 영혼으로 탄생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앤은 이름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발견한다. 다정한 앤의 입으로 이름이 불려진 대상은 다채로운 감정과 향기를 내뿜는다. 앤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채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사랑과 기쁨, 공감와 연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다.
"저는 물건에 이름이 있는 게 좋아요. 그냥 제라늄 꽃이라도요. 그러면 좀 사람처럼 느껴져요. 제라늄을 그냥 제라늄이라고만 부르면 제라늄의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잖아요. 아주머니도 사람들이 여자라고만 부르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요, 저는 저 꽃을 보니라고 부르겠어요. 오늘 아침 제 방 창밖의 벚나무에도 이름을 붙였어요. 너무 하얘서 '눈의 여왕'이라고요. 물론 꽃이 항상 피어 있지만 않겠지만, 상상은 계속할 수 있어요."
때론 기쁨과 고통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인간의 내면을 뒤흔든다. 하지만 앤은 슬픔과 기쁨, 고통과 행복이라는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들을 아무일도 아닌 일처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몸과 마음으로 체화한다.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강렬한 감정들이며, 고통을 뼛 속 깊이 느낄 수 있다면, 충만한 기쁨이 주는 행복의 의미는 더 커지기 때문이다.
"앤에게 차분해지라는 말은 성격을 바꾸라는 말이었다. 앤은 '활기와 열정과 생기'로 가득해서 인생의 기쁨과 고통을 남들보다 세 배는 강하게 느꼈다. 마릴라는 아이의 그런 점 때문에 막연하게 걱정이 됐다. 인생의 굴곡이 이 충동적인 아이에게 고통을 안겨주리라고 생각해서였지만, 기쁨에 대한 큰 능력이 그것을 보상해주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앤은 기대하는 것이 즐거움의 절반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앤은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는 대신 즐거운 일들을 마음껏 상상하고 기대하며 현재라는 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아이였다.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선택은 앤처럼 즐거움을 기대하며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원하는 일이 결국 안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걸 기대하며 누리는 즐거움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늘 말씀하시죠. '기대하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다. 그들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니.'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쁜 것 같아요."
앤은 결이 같으며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원했고, 영혼의 구멍을 이어주는 단짝 다이애나를 만난다. 앤은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의 다이애나와 영원한 친구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는 순간에도 상상력을 발휘하고, 에이번리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된 다이애나와 반짝이는 우정을 나누며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흐르는 물 앞에 가야 해. 우리는 그냥 이 길이 흐르는 물이라고 상상하자. 내가 먼저 서약의 말을 할게. 나는 해와 달이 빛나는 한, 단짝 친구 다이애나 배리와 충실한 우정을 나누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 동안 너와 나눈 기억은 내 외로운 인생에 별처럼 반짝일거야. 우리가 함께 읽은 마지막 책에 나온 구절처럼."
앤은 에이번리 그린게이블에서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며 성장하고, 공부를 위해 에이번리를 떠난다. 하지만 매슈의 죽음은 앤을 에이번리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고아였던 소녀 앤에게 새로운 세상과 사랑을 건내준 매슈의 죽음을 애도하고 마릴라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무뚝뚝했던 마릴라와 수줍은 많은 매슈 남매의 삶을 변화하게 한 힘은 앤의 풍부하고 솔직한 감정이었다. 또한 앤은 자신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던 마릴라의 이야기를 통해 길버트를 용서하고 친구가 된다. 상상하고 꿈꾸는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갈 앤의 미래는 늘 희망찰 것이다.
"앤이 퀸스에서 돌아와서 거기 앉았던 날 이후, 앤의 세계는 좁아졌다. 하지만 앞에 놓인 길이 비록 좁다 해도, 그 길에 조용한 행복의 꽃이 필 것이다. 성실한 노동과 고귀한 열망과 따뜻한 우정이 앤에게 기쁨을 안겨주리라. 어떤 것도 앤이 공상할 권리와 꿈꾸는 세계를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언제나 굽이가 있다!"
복잡한 감정들이 고개를 들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때마다 나는 앤을 생각했다. 에이번리 그린게이블스의 앤이 절망의 터널에서 표정을 잃어버린 나를 보고 손짓한다.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 기쁜 순간들을 상상하라고.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간은 꼭 찾아온다고. 앤의 재잘거림이 들리고 나는 즐거운 상상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