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작별

 

벤치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눈사람으로 변했다. 하지만 여자가 눈사람이 된 것은 한순간의 일은 아니었다. 여자는 서서히 차가워진 몸이 녹아내리며 소멸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여자에게 가해진 직장 사장의 소리없는 차별이, 직장을 그만 둔 후 자신에게 멀어져가는 아이의 행동이, 어린 시절 폭군이었던 오빠가 죽은 후에 남겨진 트라우마가 여자를 서늘한 눈사람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여자가 남동생을 이해하는 말투로 담담하게 내뱉는 독백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 고통과 사랑의 한계를 짐작하기 힘들만큼의 시련을 맞이한 여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네가 날 원망할 거라고 생각해왔을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네가 윤이와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매 순간을 난 명백히 이해했어. 자신을 건설하기 위해 가깝고 어두운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의 용기를. 정말이야,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어. 같은 방식으로 윤이가 나를 떠났다 해도 난 서슴없이 이해했을 거야. 다만 분명히 알 수 없는 건 이것뿐이야. 먼지투성이 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니, 얼음 낀 더러운 물 아랠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

 

날씨가 따뜻해질수록 여자의 심장이 녹아가고 몸의 장기가 사라진다. 여자는 하나뿐인 아이와 집과 가진 것 없는 남자 현수를 사랑했던 시간과 소중한 작별을 나눈다. 따뜻함이 전해질수록 여자의 몸은 으스러져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의 형상은 녹아내리면 다시 볼 수 없는 여자의 마지막 삶을 닮았다. 발가락의 경계가 사라질 정도에 이르러서도 여자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허공에서 흩어져 내려오는 것, 말할 수 없이 친근하고 아름다운 것, 수천 올의 속눈썹처럼 작고 가벼운 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 없는 날'은 흔히 악귀가 없는 날을 뜻하며 귀신이자 악귀가 돌아다니지 않아 인간에게 해를 끼치 않는 길한 날을 의미한다. <손>은 인간이 악귀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마음속에 자리잡은 '편견'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초등학교로 부임한 여교사는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의 학생인 용권이가 대진이를 괴롭힌다고 여겼고, 용권이를 불러다 혼낸 여교사는 화장실 거울에 적힌 자신의 이름이 적힌 욕설을 보고 용권이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여교사는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자 아이들을 추궁했고 여교사는 아이들이 책임을 물어야 할 아이가 필요했다 것을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여교사는 아이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했다. 여교사는 악귀를 없애기 위해 약콩을 삶는 날, '손'이라고 여겼던 것이 바로 자신이 범한 '악'한 마음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에게 가해진 해코지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에게 '악'을 선물하는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썩은 냄새가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방구석의 냄새일까. 집 안 전체에 스며든 냄새일까. 마을 전체에 가라앉은 냄새일까. 아니면,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일까. 문득 가만히 생각하니 그랬다. 손이 왜 매일같이 모두를 방해하는지, 전부를 망치고 싶어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천천히 묻었다. 깊이 숨을 들어마시며 그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

 

희박한 마음

 

<희박한 마음>은 꿈과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몽환적인 경계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진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디엔과 3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데런의 곁에 이제 디엔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런은 디엔이 꾼 꿈 이야기를 회상하며 자신과 디엔이 경험한 일상을 되돌아본다.

 

"지금 데런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식당 문 앞에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던 디엔의 불안하고 겁에 질린 표정을 떠올리고 지독한 슬픔과 함께 코가 찌릿해지는 통증을 느낀다."

 

데런이 화가 나서 이성을 잃기 직전의 표정은 디엔은 얼음이 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희박한 마음>의 후반부에서 데런이 20대 시절 디엔이 폭행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아무 말과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던 진실이 밝혀지며 디엔의 꾼 꿈의 이야기가 반전을 맞이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억압된 심리가 얼음이 되어 사라질것만 같을 정도로 폭군이 되어버린 데런은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한다. <희박한 마음>은 낯선 꿈처럼 희박한 마음들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과정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동네 사람

 

<동네 사람>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동네 사람의 시선을 통한 차별의 공포를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새로운 동네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던 레즈비언 커플인 나와 너에게 어느 날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개의 사고가 발생하며 벌어지는 인간의 편견과 이기심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동네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너'를 뺑소니범으로 오해하고 진실을 덮어버린다.

 

"너와 나에 관한 말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동네를 맴돌 거라는 생각. 모르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우리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는 생각. 기분 나쁜 추측과 짐작들이 너와 내 주변을 기웃거리고 고요한 일상을 넘겨다보고 결국엔 이 동네에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사람>은 동네에 살지만 주민이 될 수 없고 그저 머무르는 자로 지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레즈비언 커플의 현실적인 고통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사람들.
그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은 다 사라지고 없다. 길가에 멈춰 서 숨을 골라본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어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목덜미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또렷해진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소돔의 하룻밤

 

<소돔의 하룻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악과 타락을 상징하는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이야기를 재창조한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소돔과 하룻밤>에서 두 천사들은 소돔에 사는 사람들을 살피기 위해 떠난다. 이 소설에서 롯을 제외하고 소돔의 남자들은 의식 없는, 반성을 모르는, 본능만이 남은 인물로 그려진다.

 

"대문 밖의 남자들을 하나로 묶어놓고 있던 폭력에 대한 기대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폭력을 씀으로써 흥분을 폭발시키고, 서로에게 나그네, 낯선 사람이 되었다. 눈이 멀자 익숙하던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되었다. 눈이 멀 때 모든 사람은 낯선 사람,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이 된다. 낯섦을 정하는 것은 대상의 조건이 아니라 주체의 맹목이다. 이는 나와 다른 사람, 나그네, 외지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감이 눈먼 행위임을 깨닫게 한다. 대문 밖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슨 짓을 하거나 규범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악이다. 울부짖는 자는 울부짖는 것 말고는 다른 대응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울부짖는다. 울부짖는 것 말고 다른 대응 수단을 갖고 있는 자는 그 수단으로 대응할 것이다. 울부짖는 자는 사회적 제도적 보호로부터 제외된 자들이다. 천사는 직접 거명하지 않지만, 가령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과부들, 고아들, 보호자가 없는 자들, 떠돌이들, 아무데도 소속되지 않는 자들, 소외된 자들, 외지인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의 울부짖음은 고발이고 증언이다."

 

두 천사는 롯에게 가족과 함께 소돔을 피하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롯은 아직 도시에 대한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에 소돔 대신 작은 성으로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작은 성의 사람들조차도 롯을 나그네로 인지하며 악의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돔의 하룻밤>에서 결국 산으로 두 딸을 데리고 숨어 산 롯의 마지막 이야기가 여운에 남는다.  

 

언니

 

<언니>는 주인공인 '이영선'이라는 인물이 '인회 언니'를 대학에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대학 학과장의 조교로 일하는 '인회 언니'는 지도교수가 시킨 원서를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 '영선'에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을 도와주기를 부탁한다.

 

<언니>에서 직책을 이용하여 부당한 사리사욕을 채우는 교수의 교만함과 이에 맞서 시위를 이어가는 '인회 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회 언니'에게 엄마가 만는 지하 벙커는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회 언니'가 지하 벙커로 향한 모습은 때론 억울함으로 얼룩진 고통과 마주할 때 잠깐의 숨을 내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당한 일을 묵묵히 맞서기 위해 용기를 낸 '인회 언니'가 지하 벙커 안에서만이라도 작은 위안을 받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Light from Anywhere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Light from Anywhere 빛은 어디세어나 온다>는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스테이트 아방가르트의 유령' 전의 커미션으로 제작되었으며, 제목 'Light from Anywhere'는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당시 설립된 테마위원회의 논의에서 따온 것으로 국제 저널리스트인 마쓰모토 시게하루가 제출한 안이었다. <Light from Anywhere 빛은 어디세어나 온다> 일본과 한국의 인물들이 공존하며 전하는 이야기들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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