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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2013년 <당신의 파라다이스>로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작가 임세희의 단편 소설집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히어 앤 데어, 동국, 라스트 북스토어, 천천히 초록, 로사의 연못, 분홍에 대하여, 압시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로드'라는 9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단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변과 경계의 틈 안에서 맴돌며 죽음이라는 테마 안에서 인간의 고독과 애도의 과정을 보여주어 인상적이다.
주민 센터 직원이 본 적이 어디냐고 묻는 동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는 이 소설의 첫 번째 단편 소설 <히어 앤 데어>가 인상적이다. <히어 앤 데어>는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동희가 경험하는 외로움과 낯선 장소에서 마주하는 고독, 섞이지 못하는 감정들을 표현한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동희는 밤이 되면 오랫동안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십 대 때 떠난 한국을 사십 대에 접어들면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불분명한 것들이 오히려 진실 같았다. 캔 맥주나 방금 내린 커피가 손에 들려 있는 날은 더 오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모를 밤안개가 자욱한 날들이 이어졌다.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모든 것이 흐릿한 가운데 그녀의 의식만이 분명했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그녀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딱히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는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게 뭉실뭉실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딸과 남편을 잃고 아들 세욱이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엄마 '최동국'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건네는 단편 소설 <동국>은 가족의 죽음이라는 터널을 지나가는 인간의 슬픔과 깊은 상실을 표현한 소설로 눈길을 끌었다.
"형님도 이제 나를 동국아, 그렇게 불러줘요. 이제 다 벗어버리고 싶어요. 세욱이 엄마라는 것도, 세미 엄마라는 것도. 나는 그냥 최동국. 예전에는 부끄럽고 남자 이름 같아서 안 썼는데, 동국, 최. 동. 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단편 소설 <라스트 북스토어>는 주인공이 동생네 가족을 보러 가기 위해 엘에이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헌책방 'The last Bookstore'에 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올케의 우울증을 알게 되며 올케와의 어느날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인공은 엘에이 다운타운의 복잡하고 바쁜 일상과는 달리 알 수 없는 곳에 다다른 듯이 올케가 경험하는 혼란과 두려움의 감정을 삶을 멈추어서 마주한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올케의 이름을 부르며 주저앉은 주인공은 슬픔을 비의한 자를 쓰다듬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지만, 때로는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들 녀석이......, 녀석이, 마치 세상을 오래 산 사람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고백했어요. 자신은 친구들이랑 다르다고. 아주 많인 다르다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내 귀를 틀어막고 싶었는데, 다 들어버리고 말았어요. 녀석은 담담한데 나는 혼란스럽고 많이 두려웠어요. 다르게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이에요. 그걸 내 아들 녀석이 겪어야 하다니. 나는 녀석이 마주칠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몸이 떨려요.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좀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될까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이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더 힘든 일에 비하고 용기를 내고 견디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고 살 거예요. 그 말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아름다운 회피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모든 말이 위선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어요."
임채의 작가의 단편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가에 대한 실존을 질문하는 사람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고독한 사람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시간 안에서 애도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