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에티 힐레숨 -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지음, 이창엽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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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 힐레숨은 네덜란드 유대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에티 힐레숨은 열한 권의 일기와 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이 책은 에티의 일기와 편지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추린 일종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을 직접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책에 인용된 글들을 통해서나마 에티 힐레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책의 부제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이고 저자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걸로 미루어, 근본적 변화란 신을 모르던 사람이 신을 알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려니 짐작했다. 책 날개에도 에티 힐레숨의 일기와 편지가 홀로코스트 시대의 가장 놀라운 신앙 고백 문서라고 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녀는 초교파적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녀의 은 기독교라든가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기성 종교의 신으로 한정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신은 그 신들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곳, 더 근원적인 곳에 머문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이슬람 경전 코란과 유대교의 탈무드가 들어있었고, 그녀가 애독한 책들은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시인 릴케 그리고 신약성서였다.

 

에티 힐레숨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할 방도를 모르겠다. 마치 신약성서의 바울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회심이 신비로웠던 것처럼 에티 힐레숨의 그것도 그렇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깊고도 넓어서 간단히 가늠할 수 없고, 마치 성경을 읽듯 한 줄 한 줄을 세심하게 읽으며 오래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모든 사람은 자기 내부로 시선을 돌려서, 남들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 내부에서 파괴해야만 해. 우리가 세상에 아주 작은 것이라도 증오를 더하면 더할수록 세상을 더 살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 최근에 깨달았다. 모든 순간은 새로운 순간을 낳고, 생생한 가능성이 충만하며,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같을 때가 있다. 문제가 있는 순간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부질없이 오래 끌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풍요로운 순간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장대한 일련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 지금 나는 햇빛 아래 작은 테라스의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 빨래통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밤나무의 단단하고 짙은 색 가지 위에 해가 걸려있는데, 과거와 분명히 달라진 게 있다.... 과거에는 지성으로 나무와 태양을 받아들였다. 그것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말로 쓰고 싶었고, 모든 게 서로 잘 어울리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 깊은 원시적 느낌을 정신으로 헤아리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나는 자연과 모든 걸 나에게 복종시키고 싶었다. 그것을 설명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일어나는 그대로 놓아둔다... 햇빛 아래 앉아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는데, 마치 이 새로운 삶의 인식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문득 깊은 내면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생각으로는 아무 데도 도달할 수 없다. 생각은 학문 연구에 훌륭하고 뛰어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생각으로는 감정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전혀 다른 것이 필요하다. 감정을 다루려면 수동적이 되어야 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조각 영원과의 접촉을 회복해야 한다.

 

- 언젠가 분명히 생각과 감정의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 말하지 않고 외부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완전히 침묵하고 가장 깊은 존재의 소리가 울리게 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 내 안에서 가장 깊고 최선인 것, 그것의 이름은 신이다.

 

- 지금은 전쟁 중이다...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그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는 걸 안다. 박해와 억압, 독재, 무력한 격노, 잔인한 가학증에 대해서도 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안다... 하지만 내가 무방비 상태일 때, 혼자 남았을 때, 나는 문득 삶의 맨 가슴the naked breast of life에 안긴다. 삶의 팔은 나를 감싸며 부드럽게 보호해 주고, 나의 심장 박동은 아주 느리고 규칙적이며 부드럽고 조용하고도 한결같이 뛴다. 그것은 지극히 선하고 자비롭다. 삶에 대한 나의 태도도 그렇다. 전쟁이나 그 어떤 몰상식한 인간의 잔학 행위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 한가지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즉 당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우리가 스스로를 돕기 위해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신이여,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작은 조각을 보호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살핍니다.

 

- 중요한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느냐다.

 

- 밤에 수용소에서 판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주위에서 여자들과 아이들이 조용히 코를 골거나 꿈꾸면서 소리를 내거나 가만히 흐느끼거나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낮에 나에게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도 않아. 생각하고 느낀다면 분명히 미쳐 버릴 거야.”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몇 시간이고 잠들지 않은 채 누워서, 한없는 다정함으로... “제가 이 막사의 생각하는 가슴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 슬픔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슬픔으로부터 도망가면 안 되고 어른스럽게 슬픔을 견뎌야 한다. 증오를 통해 슬픔을 줄이려 하지 말고, 모든 독일의 어머니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도 말라... 모든 사람이 슬픔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견디면, 세상을 가득 채운 슬픔이 누그러질 것이다.

 

-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국경이 없다.

 

- (암스테르담의 긴 도로를 터벅터벅 걸으며 유대인 출입이 금지된 길가의 카페들을 지나쳤고, 옆으로 유대인 탑승 금지 전차가 지나갔다. 그 순간 에티는 깨달았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 땅 위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며 지치고 발이 벗겨졌다... 내가 지치고 병들고 두려울 때 난 혼자가 아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살았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나이고, 모든 고통은 삶의 일부다.

 

- 만일 (수용소로 가라는)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면으로 물러나 내 몸과 영혼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기력을 모두 끌어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테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을 것이다. 그리고 남겨 뒀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바지 한 벌과 상의를 만들어야겠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최선을 다해 안심시킬 것이고, 짬이 날 때마다 그에게, 언제나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려 할 것이다... 조만간 치과에 가서 많고 많은 충치를 때워야겠다. 수용소에 있을 때 이가 아프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배낭을 구해서 꼭 필요한 것들만 채워 넣을 것이다. 어쨌든 모두 품질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성경을 가지고 갈 것이고, 릴케의 얇은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가져가고, <기도시집>도 한 구석에 끼워넣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진은 가져가지 않겠다. 다만 그들의 얼굴과 익숙한 몸짓들을 모아 마음 속의 공간 벽에 걸어두겠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 두 손과, 단단한 어린 가지처럼 표현이 풍부한 손가락들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그러면 두 손은 기도로 나를 보호해 주고 마지막까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탐색하는 표정을 지닌 짙은 색 눈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 한때 히틀러가 나오고, 다른 때는 폭군 이반 4세가 나오고, 다른 때는 종교재판이, 그 다음에는 전쟁, 전염병, 지진, 기근이 일어난다.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고통을 견디는 것, 고통에 대처하는 것, 자기 영혼의 작은 구석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 그렇다. 우리는 내면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신과 천국은 물론 지옥과 땅과 생명과 죽음과 모든 역사가 우리 안에 있다. 외부는 단지 많은 버팀목일 뿐이고, 필요한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것과 더불어 악한 것까지,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악한 것을 고치는 데 삶을 바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개인들에게 증오를 쏟을 수 없다. 어느 한 사람을 비난하면 안 된다. 체제가 그들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그들도 자신이 처한 특정한 개인적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밭아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들도 슬픔, 불의, 굴욕에 대응히야 하고 끔찍한 부당함과 굴욕을 겪을 때도 있다. 나치 이데올로기가 모든 사람의 집단적 마음을 해쳤다.) 불온한 구조는 무너질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로, 심문 당하는 사람은 물론 심문 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도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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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인상주의 그림 50
이네스 야넷 잉겔만 지음, 이정연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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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돼서 아쉽다. 판형이 비교적 크고 인쇄도 나쁘지 않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됐고 작품 설명도 개성 있다. 인상주의에 대한 전형적 시각을 벗어나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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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디테일로 보는 명작의 비밀 1
다이애나 뉴월 지음, 엄미정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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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작품 20점을 선정해 세부적으로 감상하게 만든
책이다. 화가가 어떤 색들을 사용했는지, 붓질과 구도는 어떤지, 그림의 주제를 어떻게 잡았는지 등 설명이 전문적이고 구체적이다. 저자의 안목이 참신하고 유익하다. 번역은 절대 나쁘지 않으나 판형이 작아서 그림을 감상하기에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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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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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실의 자연사,라는 부제가 책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저자는 가족도 자연의 일부임을, 정원의 동식물이 살고 죽는 풍경 속에서 슬프게 납득해나간다. 아름다운 글과 삽화에 비해 번역이 좀 아쉽지만 최상이 아니란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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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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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야만적인 신: 자살 연구. 저자가 제목에서 암시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적인 힘에 대한 인간의 응전 혹은 반응이다. 여기서 야만적 신은 아즈텍의 신 테츠카틀리포카를 가리킨다. 이 신은 세상에 번영과 부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앗아가기도 하는 무서운 존재로서 사람들은 흥망성쇠를 쥔 그를 두려워하고 숭배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은 운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살은 운명에 의해 궁지에 몰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인간적 반응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분명한 폭력행위일지라도 말이다.


 

저자는 자살을 대하는 사회의 극단적이고 완고한 두 태도를 지적하는데, 하나는 종교적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태도이다. 전자는 자살을 도덕적 범죄나 질병으로 단죄하며, 후자는 자살을 통계학적 연구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자살자 개인의 절망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완고한 편견들을 벗겨보려는 목적에서 자살을 역사적·사회적·예술문화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다섯 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첫 1장과 마지막 5장은 알바레즈 개인사와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에게 자살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사람 일 혹은 운명은 느닷없이 우리를 덮치기 때문이다.


 

1장 프롤로그: 실비아 플라스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 저자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잘 알았다. 시 비평가로서 알바레즈는 그녀의 시가 성장하고 변모해 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지인으로서 그녀의 개인사도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저자는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시를 제한하고 오해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그녀의 자살은 실수였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녀는 불행한 과거사가 있었지만 죽음과 대결해서 이겨내는 것을 시인됨의 자격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전에도 자살 시도는 있었으나 불행히도 이번에는 그것이 성공했을 뿐이다.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예술에 대해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생동감, 지적 요구, 거친 위트, 위대한 상상력의 자원, 맹렬한 감정, 그리고 절제불행을 예술로 바꿔 놓을 수 있었던 용기가 이 사실로 인해 간과되지 않기를 바란다.



2장 자살의 역사적 배경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2장 서두에 인용된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자살이 죄였던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이 질문은 대단히 용감하다.


서구 사회에서 자살은 공포와 적대감의 대상이었다. 자살자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명예도 훼손되었다. 자살을 범죄로 보는 관념은 기독교가 고안해 낸 것으로서, 사실 기독교의 응징은 원시적 공포와 미신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원시사회에서 자살자의 망령은 복수를 부른다고 믿었고 이것을 정화시키기 위한 주술적 행위를 했는데, 기독교가 이교도의 제전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믿음과 행위가 기독교화된 것이다. 그러나 신구약에는 직접적으로 자살을 금지하는 표현이 없다. 오히려 유다의 자살을 참회의 행위로 해석하는 태도가 보이고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죽음도 일종의 자살로 간주했다.


한편, 북유럽 신화나 드루이드교, 플라톤 철학, 스토아학파는 자살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생 자체가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변한다면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는 합리적 행위가 된다고 암시했으며 고통스런 병이나 견딜 수 없는 속박은 자살할 만한 충분한 이유라고 보았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른바 순교열이 있었다.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먹이로 내주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죽음이 천국의 지복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죽었다. 순교는 천국으로 가는 보증수표였다. 이 문제는 기독교 교리에 내재된 모순이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살을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살은 생명을 주신 신에 대한 대죄이며 정의와 인간애에 어긋나는 죄라고 규정했다. 생명은 신이 주신 선물이고 고난은 하늘이 지운 운명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생명을 버릴 수 없으며 운명을 견디는 것만이 인간 영혼의 위대함을 재는 척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헤브류 장군 요제푸스의 견해를 종합한 것으로써 순수한 기독교적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후기 르네상스에 이르면 자살은 기독교 신앙과 도덕 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자살을 옹호하는 주장이 우회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반대 주장도 종교적 배경을 깔고 강하게 펼쳐진다.


현대에 와서 자살은 사회현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고 자살을 이해하려는 긍정적 시도가 행해지는데 한편으로는 인간성을 무시하는 부정적 결과도 낳는다. 과거에 교회가 자살자를 유죄 판결한 행위는 최소한 자살자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인간에 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자살은 상처받기 쉽고 가변적인 인간 세계로부터 쫓겨나 과학이라는 격리 병동 안에 꼭꼭 숨겨져 버린 것이다.(Pp.108-109)'

 


3장 자살. 그 폐쇄된 세계

자살은 선택의 결과이며 부인될 수 없고 번복될 수 없는 행위다. 자살자는 분명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자기 인생에 대해 최소한의 자유를 행사하며 원치 않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살을 유치한 짓으로 격하시키고 정신의 평형이 무너져 있을 때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행위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자살을 윤리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뒤르켐에서 비롯된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자살이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며 자살률이 높을수록 사회적 긴장과 불안도 크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회공학적 접근은 자살 문제가 사회적 양심과 관심, 잘 발달된 사회사업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이것 역시 자살에 대한 왜곡된 태도다. 자살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인간적 특성이며 사회가 아무리 완벽해도 일어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살의 핵심은 무엇일까. 알바레즈는 내적 거부와 절망감이라고 보았다. 사회학자 폰 앤딕스 박사의 연구에서 다뤄진 29세의 여성 페니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오래도록 수모를 당한 끝에 자살하는데 그녀의 죽음은 상처받은 자존심과 굴욕감 때문이었다. 통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학적 접근 방식은 자살의 직접적이고 부분적 원인을 일부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페니의 사례처럼 장기간 완만하게 진행된 배후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카뮈는 자살이 위대한 예술작품들의 경우처럼 가슴 속 침묵에 예비되어 있다고 말했다. 자살의 바탕에는 극도의 비참한 상태와, 어떤 사회공학으로도 경감시킬 수 없는 결정적인 내적 고독이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자살의 진정한 동기는 심층의 세계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자살을 죽음 본능 이론으로 설명한다(후반기에 그는 이 이론에 대해서 스스로 의문을 가졌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살자는 일종의 격정 상태에 빠져서 자아가 압도된 상태에 있다. 그는 마치 악몽이나 공상과학소설 속 환상처럼 논리적이면서 동시에 비논리적인 세계 속에 놓이게 되는데 그 세계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제 나름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고 있지만 완전히 도착되고 전도돼 있다. 자살자가 일단 자살을 결심하면 그는 완전히 폐쇄되고 절대적 확신을 가진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자아는 너무 연약해서 과거의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표면으로 뚫고 나와 현재의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방해한다. 자살자의 삶은 대단히 비관용적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알바레즈는 쾌락 원칙을 따르는 인간의 세속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대신 삶을 택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추정한다. '바로 이 세속성이 인간의 강점일지도 모른다... 자살을 반대하는 최후의 논거는 생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Pp.168-169)' 


알바레즈는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을 예로 든다. 그는 스탈린 치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었는데, 자살하자는 아내의 말에 그는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종말이란 어디서나 똑같은 법인데, 이곳에선 그걸 재촉까지 하고 있다고 말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세속의 공포가 우리 삶에 어떤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어요...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의 풍요로움과 강렬함의 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어요라는 만델스탐 부인의 말은 인간에게 내재된 생명 본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Pp.183-184)


 

4장 자살과 문학

4장에서는 낭만주의자부터 다다이즘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살에 대한 인식이 변천하는 과정을 개괄한다. 요약하자면, 낭만주의자들은 자살을 새로운 해방으로 인식했고 천재성이 치러야 하는 많은 대가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다다이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술을 포함한 모든 가치관을 거부하며 예술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의 20세기 예술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예술가들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한 것인데, 현대예술운동의 흐름은 세상의 재앙에 대해 더 내적으로 반응하여 예술가가 희생자이자 제물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다시 실비아 플라스로 돌아온다. 엘리어트 이후의 현대 예술가들은 작품과 예술가의 삶을 상호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인생이란 우리가 체험한 것을 고유하게 해석하고 재조직하며 은유적으로 상상하는 행위의 결과라고 보았다. 그래서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 되어서 경계가 없어진다. ‘극단주의시인들은 정신적 탐험을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개인적 혼돈과 대면하며 무의식의 심연까지 내려가 그곳으로부터 시를 건져 올린다. 실비아 플라스는 자기 내부의 분노와 죄의식과 거부와 사랑과 파괴성을 치밀하게 탐색하면서 죽음과 정면으로 대결하고자 했다. 그녀에게 '자살은 하나의 모험이었을 뿐이다.(p.259)' 따라서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과 작품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비단 예술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죽음의 형태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하게 다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5장 에필로그 해방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신이 자살 실패자임을 고백한다. 결혼이 고비를 맞았던 인생의 한 시기에 그는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이 너무도 혼란스럽고 너무도 꽉꽉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는 숨쉴 공기도 없고 출구도 없는, 하나의 폐쇄된, 그리고 응집된 세계에 살고 있었다.(p.268) '그는 자살의 폐쇄된 세계에 들어섰고, 아내와의 불화는 자살의 원인이 아니라 기다리던 구실이었다. 자살 실패 후에 저자는 자신이 낙관주의자였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는 절대적 절망감을 느꼈고 자신에게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어딘가에 해답이 있다는 낙관적 기대를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 실패는 죽음 속에도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저자는 '행복하든 불행하든 크게 상관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자는 자살 시도 후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죽은 자신은 극도의 긴장, 감수성, 자아의식, 오만함, 관념주의 같은 것들이었다. '죽음은 단지 하나의 끝, 더도 덜도 아닌 확실한 끝이라는 사실을, 내 자신의 육체와 신경 감각을 통해 스스로 발견한 이래, 모든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자체가 한 형태의 죽음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p.284)' 자살 시도를 하기 전의 그와 시도 후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인 셈이다.

 

저자는 말한다. 자살은 도덕을 초월한 문제이며, 사회학적으로 예방이 가능하지도 심리학적 질병으로 단정지을 수도 없는 문제라고. '자살 행위 자체에 대한 완벽한 철학적 근거는 아직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제시되지 못했다(p.179)'라는 지적과, 자살은 비극적 운명을 맞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하고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반응(p.285)'이라는 알바레즈의 말은 자살을 설명해 보려는 수많은 이론과 연구 속에서 가장 진솔하게 자살을 바라보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죽음이 닥쳐왔을 때 그것은 어쩌면 자살보다 더 불결하고 불편할 것이라는 말로써 알바레즈는 이 글을 마친다. 실은 자살이 문제가 아닌지 모른다. 문제는 죽음인 것이다. 우리 중에서 누군가가 감히 스스로 죽음을 당겨옴으로써 우리에게 생의 종결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 자살에 대한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모든 자살에는 이유가 있을 테고, 모든 자살자는 그만의 사정으로써 죽는다. 이 책에서 다룬 여러 사례들과 저자의 경험담도 그저 수많은 이야기들 속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자살자는 절망과 절대 고독 속에 놓여있었다는 것. 우리도 그런 막다른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동류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잊지 말고 그들 앞에서 예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의 삶을 살았고 어쩌면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삶과 싸웠을 위대한 패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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