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 고딕 대성당으로 보는 유럽의 문화사
사카이 다케시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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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절판된 책이어서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고딕의 정신성은 한국의 문화에서는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완전히 다른 바탕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식의 이야기결로 짜인 서구의 정신사를

다만 어렴풋이나마 알고자 하는 바람에서 읽었다.

 

유럽의 성당을 들어갈 때 느끼는 성스러운 느낌,

내 안에서 고양되는 -뭐라고 이름붙이기 힘든-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문화의 바탕과는 상관없는

인류 보편적인 것이고

인간 본성에 닿아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두려운 것, 성스러운 것, 아주 큰 것, 신비, 뭐 이 정도로 막연하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저자는 고딕의 기본 정신을

자연(숲),

비이성적인 것 내지는 비합리적인 것,

개방성

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셋은 어쩌면 셋이 아니라 하나일 수도 있다.

자연은 데카르트의 철학처럼 철저하게 질서정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속성은 이성을 벗어난 것, 신비하고 감각적인 것, 두려운 것, 인간을 한없이 작고 약하게 만드는 것, 절대 완결되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고딕 성당이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생성과 파괴의 모성신앙의 강한 기운을 건축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중세의 그 엄격한 종교관 아래서

민간신앙의 노골적이고 이교적인 해학의 장이 펼쳐졌다는 것 또한 그랬다.

 

건축이나 문화에 대한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조선시대에 경직된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도

탈춤으로 그 시대의 권위를 비웃던 하위문화가 존재했던 것처럼

아마도 중세에도 그런 것이 있었나보다, 유추해볼 따름인데,

조선시대의 그 해학정신이

유럽의 경우에는 건축으로 즉, 물질적으로 더 뚜렷하게 족적을 남겼다고 하겠다.

 

어쨌거나 문화사의 발전과정은 

개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쪽으로도 어느 정도 힌트를 주는 것 같다. 

인간 안의 어두운 구석, 죽음과 성스러움, 파괴와 생성, 어둠과 빛, 광기와 이성,

무질서와 질서가

끊임없이 엎치락 뒤치락

태어나 죽을 때까지 씨름하며 이어지는 것이

개인의 정신사가 아닐까 싶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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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 골드핀을 향한 도전
마이크 멀레인 지음, 김은영 옮김 / 풀빛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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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쾌할 수가! 자연스런 유머를 즐기고 싶다면 강추. 더불어서 무엇인가를 뜨겁게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건지도 알 수 있다. 하루쯤 이런 사람 옆을 따라다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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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1 -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편 유럽 도시 기행 1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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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의 명성에 기대어 쉽게 쓰여진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박학다식의 반복적 재생산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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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발견을 향한 피아노 연습
시모어 번스타인 지음 / 음악춘추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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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타협, 변명, 속임수, 가짜 등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연습한 대로 연주하는 것이다.‘(p.319)
‘종교와 같은 심취와 어린아이 같은 정열‘로 내 앞의 무엇에 나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꼭 음악일 필요는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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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7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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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맞물리는구나, 감탄을 하며 읽었다.

결말은 나의 예상을 벗어났고,

나니아 나라를 하나의 이상향으로 간주하며 읽었던 나로서는

나니아가 멸망한다는 결말이 놀라웠다.

 

한 이야기가 죽음과 파멸로 마무리가 됨에도

나는 안도했다.

이 안도감은 무엇일까?

 

....나니아는 시작과 끝이 있었지. 그것은, 언제나 여기 이렇게 있고 앞으로도 영원할 진짜 나니아의 복사판이나 그림자에 불과해... (P.235)

 

저자는 플라톤의 철학을 기독교 사상과 결합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진짜 세상의 그림자임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믿음이다.

믿음은 논박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믿을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다만, 이 세계관이 나에게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주는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 까닭은 삶이 고달프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씁씁하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그곳'이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일까?

 

또 하나 내게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신을 믿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신을 믿는지가 요체임을 저자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하느님을 믿는지, 불교의 부처님을 믿는지, 이슬람의 알라신을 믿는지는 정작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속에서 나니아는 아슬란을 믿고, 적대국 칼로르멘에서는 타슈 신을 신봉한다.

이야기 말미에서 타슈 신을 온 마음으로 믿는 한 병사(아메스)를 향해서 아슬란은 "아들아," 하고 부른다. 

아메스는 놀라서 말한다.

"슬프게도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타슈 신의 종이옵니다."

그러자 아슬란은 대답한다.

"아들아, 네가 타슈 신에게 다했던 정성은 나에게 한 것과 다름없느니라."

 

나는 이 말을,

선한 정성은 결국 향해야 할 신에게 이르게끔 되어있다는 것,

혹은

신이란 사람의 가장 선한 정신이 지향하는 바로 그것,

이라고 이해했다.

C.J.루이스의 이 철학이 당시 영국 사회에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기독교의 사상이 단순히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 이상의 더 높고 깊고 넓은 정신성과 통함을 그 사회가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닐까 싶다. 

 

주변에서 접하는 신자들의 기도, 법회, 예배, 미사 등에서 들리는 말과 생각들이 때로는 너무

편협하고 강팍해서 마음이 오히려 메말라버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은총을 받을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는

단순한 말이 진리이기는 하나

그것 이상의 더 풍부한 이야기로 나의 마음을 적시고 싶은 갈증을 느낄 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넓디 넓은 아름다운 세게 속으로

깊디 깊은 푸른 물 속으로

자유롭게 헤엄쳐들어가는 것 같은,

해방되어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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