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걸작 - 밥 로스에서 매튜 바니까지, 예술 중독이 낳은 결실들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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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이 세상을 새롭게 본다. 예술 작품들은 예술가가 무언가에 헌신한 결과물이며, 아름다움 또는 미학에는 정답이 없다. 저자 키멜만의 말마따나, '예술가들은 그냥 보는 행위를 즐길 뿐, 옳게 보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감상자인 우리에게도 그게 더 자연스럽고 상식적이다. 

 

한 치과의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전구를 일평생 수집했다. 그의 박물관을 예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그곳에서 전구라는 사물을 유심히 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구가 아니라 전구를 응시하는 우리의 행위이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 내지는 창작이란 감상자의 편에서도 일어나는 무엇이다.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데, 다른 눈으로 본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무엇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저자에 따르면 예술은 기본적으로 '로르샤흐 테스트' 같은 것이어서,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어났던 어떤 일, 어떤 경험,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일정한 몇 개 요소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내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 좋은 예술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좋은 예술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도 중요하겠다.   

 

저자의 표현대로 '나 자신보다 훌륭한 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을 '봄'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내가 보지 못했던 가치있는 것들일 테다. 내 주변의 섬세하고 작은 것들,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 내가 무심하게 만지고 씻는 그릇들, 사물과 사물 간의 익숙하다못해 지루한 관계성 같은 것들... 

 

평생 집안의 사소한 사물들이나 주위의 평범한 사람들만 그린 조르조 모란디나 샤르댕, 황량한 허허벌판에 수많은 피뢰침을 꽂거나 초거대 조형물을 만드는 소위 대지예술가들은 이렇게 해서 우리의 '보는 습관'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껏 눈길을 주지 않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응시'한다. 깊은 응시는 일종의 명상일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은 일생의 소명 같은 것일 게다. 이 책에서 키멜만은 작품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며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 예술가들을 이야기하는데, 작품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경건해진다. '일이 잘되지 않을 때조차 날마다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들의 성실함 앞에서 어떻게 그들의 작품의 가치를 쉽게 운운할 수 있을까. 

 

마이클 키멜만의 이 책은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책 전반에서 키멜만은 그들의 작품을 가볍게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지 말 것, 노력의 산물인 그들의 작품을 깊이 응시해보라는 조언, 그렇게 해서 열린 우리의 시선이 발견할 새로운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 말투는 예술과 예술가들에 대해 깊은 존경으로 (일방적인 찬사가 아니라) 일관하고 있어서, 내게는 이 책이 마치 사랑의 편지처럼도 읽혔다.    

 

책에서 소개되는 모든 작품들에 관심이 갔지만 특히 오노 요코의 작품 설명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샤르댕도. 

 

평이하게 쓴 글 같지만 한번에 읽고 끝낼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두 번을, 어떤 대목은 되돌아가서 거듭 읽었을 만큼 깊은 사색을 거쳐 나온 글이었다. 

 

얼핏 난해하게 느껴지거나 취향에 맞지 않거나 너무 유명해서 식상하기까지 한 작품 앞에서도 '회의'는 하되 '냉소'를 보내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이 피땀으로 창작한 작품 앞에서 그것이 감상자로서 내가 취해야 마땅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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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6탄: 하이타니 겐지로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두 작품을 읽었다. 1934년에 태어난 사람이니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옛날 사람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시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일본 어린이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이를테면, <너는 닥스 선생님이 싫으냐>의 첫 대목은 이렇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하고 교장 선생님이 말했지만, 새학기가 되어도 희망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리츠코는 생각했다.

가정교사는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오고,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학원에 가야 하고, 4학년이 되었는데도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할 수 없다.

"다 너를 위해서야." 엄마는 입만 열면 이렇게 말한다.

 

전형적이다. 지난 수년 간 읽어본 우리나라 동화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이 꽤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원 뺑뺑이를 돌고 저녁은 학원가의 식당에서 해결하며 새벽 2,3시까지 학원 숙제를 한다는 풍문은, 풍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렇지 않은 아이들도 물론 있지만 문제는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1930년대(!)에 태어난 일본(!) 작가가 쓴 작품이 바로 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짚고 있다는 것. 심란하고 심각하다. 한국을 포함해서 많은 사회들이 일본에서 진작에 시작된 이 병적인 현상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니까.  

 

또 하나, 전형적이라고 느낀 점이 있다. 작가의 시선 혹은 시선의 색깔이라고 해야 할까, 방향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 역시 기시적이다. 한국 동화 작가들의 서술 방식이나 서술 내용과 참 유사하다. 어른들의 과도한 욕심에 짓눌리는 어린이들을 '대변'하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른이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동심의 세계를 정답처럼 설정해놓은 듯한 느낌을 막연히 받았다. 선하고 착하고 눈처럼 순수한, 하지만 약하고 다친, 동심.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아이들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그들은 약하고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묘사한다. 아이들 스스로는 자기들이 약하고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바라봐지기를 원할까? 혹시 아이들은 "나는 그냥 새예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새 말예요!" 하고 말하고 싶지는 않을까? 아무 수식도 붙지 않은, 그래서 모든 수식이 붙을 수 있는, 그냥 '새'. 약하다는 말도, 아름답다는 말도, 부담스러운, 그냥 '새'로 그려지는 아이들이 나는 좋다. 작가가 이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이 느끼는 대로, 그들의 생동하는 힘을 직접적으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 3자의 거리감 없이, 이상적인 교육자이자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의 관념적 색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내 개인적 생각일 뿐이고, 어쩌면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일본 문화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상당히 묘한 분위기가 하다. 자폐적이면서 호의적이고 독립적이면서 협조적이고 규범적이면서 규범파괴적인 모순이 있다. 병적으로 완벽성을 추구하고, 그래서 동심조차 완벽하게 순수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일본 문화를 접할 때면 한국 문화만의 특성을 더 잘 알 것만 같다. 소탈함. 뒤틀리지 않고 시원시원한 느낌.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은 이런 소탈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정서를 '한'이라고 한다지만 나는 글쎄요... 동의하지 않는다. '한'의 정서는 일본과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참, 그러고 보니 <바다는 눈물이 필요 없다>도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작가도 말했듯이, 소설의 배경은 집필 당시에는 (그 당시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인데)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일본 모습이다.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 같다. 문명의 발전, 과학의 발전으로 세상은 좋아지면서 동시에 나빠지는데, 한 손으로 그린 그림을 다른 한 손으로 지우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 우리 인간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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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5탄: 태양의 전사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와우!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인 채로 10년 이상을 놔둔 책이었다. 내가 감히 무시했던, 이 시대의 고전이다. 이 책 역시 표지 탓을 해야 하나... 어쨌든, 책의 운명 내지는 작가의 운명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책과 작가는 무의미한 존재다. 시간과 함께 묻히고 사라진다. 다행히 나처럼 표지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눈밝은 현명한 독자들 덕분에 이 작품은 아직도 건재하다. 진작에 이 책을 읽고 별점과 평을 남긴 위의 독자분들을 존경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다. 지리적으로는 아마도 그리스 어딘가인 것 같고, 시대적으로는 청동기다. 아직 철기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 사냥과 목축이 주축이었던 '황금빛' 부족의 한 소년의 성장기가 중심 줄거리인데,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것은 특정 연령대에만 한정되지 않는, 전 연령대의 독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두 개, 세 개 줄거리가 꼬이면서 굵직한 드라마를 연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시도와 좌절과 극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상당히 굴곡져 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의 예상을 종종 무너뜨려가면서, 마치 독자들과 게임을 하듯 뜻밖의 방향으로 휙휙 길을 틀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물들의 경우에도 특히 주인공의 심리가 간단치 않다. 다른 인물들의 개성 역시 잘 살아있다. 그래서 이 점도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데 상당히 기여한다. 이 때문에 줄거리만 쉽게 죽죽 읽어나가지 못하고 한 줄 한 줄 음미하게 되고 때로는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게 된다. 

 

작품을 읽으면서 특히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웠다. 하나는, 문장.

문장은 단순히 미려한 것으로 훌륭해지지 않는다. 핵심은, 당연히, 문장을 만들어내기 이전의 사고와 감수성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백조가 방향을 돌리자 드렘은 두 개의 얕은 물웅덩이 사이 보석처럼 영롱한 초록빛으로 빛나는 판판한 풀밭 위를 낮게 날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거대한 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햇살이 하얀 깃털 위에 내리비쳤다. 그림자가 땅을 달리는 검은 거울상으로 함께 날았다. 눈으로 빚어진 새와 그림자로 만들어진 새. (p.75)

 

세상이 갑자기 몹시도 상냥해진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자주 느꼈지만, 그건 드렘의 커다란 흰 백조와도 같이 눈이 시리게 선연한 아름다움이었지 지금껏 상냥스러움은 느껴보지 못했다. (pp.311-312)

 

묘사도 묘사거니와, 하늘의 새와 땅의 새 그림자를 '거울상'으로 압축할 수 있는 명민함, 세상을 '몹시도 상냥'하다고 느껴서 거기에 '상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감수성이 내게는 너무나 신선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철저한 시대적 고증이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청동기 시대의 부족 문화와 식생활, 거주 형식, 의생활, 생존법, 부족의 구성, 성인식 같은 것들에 대한 서술은 철저한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소설은 학술서가 아니므로 그 내용이 백퍼센트 정확해야 할 필요는 없고, 이것이 소설이 누리는 특권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소설은 어쨌든간에 최대한 정확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로즈마리 서트클리프는 의무를 다했다. 그녀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청동기 시대의 한 부족의 삶을 소설로 구축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실의 빈틈을 채우는 그녀의 경이로운 상상력 덕분이다.

 

이 작품에서 아홉 살 어린 소년은 기대와 실망과 고통의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공동체의 유능한 성인 구성원이 되었다. 현대 시대에도 여전히 소년들은 성인이 된다. 나도 그랬다. 성인으로 가는 그 길에서 겪는 실패와 성공은,이후의 다른 시기에서 경험하는 그것들보다 더 생생하다. 최초의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이 어리고 여리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기억이다. 여린 살은 매서운 겨울 바람에 더 유약하니까. 이것은 심리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성인식의 목표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모양은 다르지만 실질은 동일한 것 같다. 아이가 공동체의 유능한 성인이 되는 것. 그것을 위한 도전과 응전, 실패와 좌절.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한편으로는 '살아있다'는 느낌과 직결되는 듯싶다. 이 강렬한 체험이 그 이후에는 점점 막연하고 먼 북소리처럼 희미해지기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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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전사 비룡소 걸작선 28
로즈마리 셧클리프 지음, 찰스 키핑 그림, 이지연 옮김 / 비룡소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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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책 정리하기 4탄: 창가의 토토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토토는 바로 전에 읽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와 영혼의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아이다. 기질적으로 너무나도 흡사한 두 아이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환경에 놓여있다. 노래하는 작은 새와 같았던 제제가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별처럼 빛났다면, 봄날의 나비 같은 토토는 너그럽고 호의적인 어른들 속에서 싱싱하게 자란다.

 

사람들은 인간이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는 얘기일 텐데, 기질은 옳고 그름에서 벗어난 생물학적인 자질임에도 사람들은 엉뚱하게 이것을 도덕적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넌 나쁜 아이야, 넌 착한 아이야,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번 나쁜 아이가 되면 계속 나쁜 아이로만 살 수 밖에 없다. 문화권, 시대, 부모에 따라서 아이는 나쁘거나 착하다고 판단되고, 이 판단은 '기질은 안 변해'라는 말로 영구히 굳어져 버린다.  

이렇게 해서 제제는 작은 악마가 되었고 토토는 '사실은 착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맞는 말처럼도 들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제제가 다른 제제가 될 수 없고 토토 역시 다른 토토가 될 수 없으니까. 노래하는 작은 새가 불행히도 폭풍우를 만난다고 해도 뱀이 될 리 없다.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순수하면서 너무나 연약하기에.     

   

하여간 <창가의 토토>를 읽으며 여러가지로 마음이 무거웠다. 20세기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생각났고, 그 속에서 아이를 키운 지난날들이 떠올랐고, 한없이 눈이 어두웠던 부모로서의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와 내 아이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불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거기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하지도 못했고, 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똑같은 그 열차가 선로를 달리고 있다.

 

그래서 부모가 될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p.s. 번역에 마음이 갔다. 2000년을 코 앞에 둔 '1999년 저물어가는 한 해'에 옮긴이의 말을 썼다고 나와 있으니 번역한 지가 20년 전인데 그래서인지 옛스런 느낌이 살짝 났지만 그것조차도 정감이 느껴지는 참 자연스럽게 잘 옮겨진 번역문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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