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 책 정리하기 6탄: 하이타니 겐지로
"아이들이 다 크고 이제는 영영 읽지 않을 어린이 청소년 책들을 서가에서 정리하자니 책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읽을 요량으로 몇 권을 추렸다. 아이들 책들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기도 해서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읽지 않고 정리해버렸으면 아까웠을 뻔했다."
하이타니 겐지로의 두 작품을 읽었다. 1934년에 태어난 사람이니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옛날 사람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시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일본 어린이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이를테면, <너는 닥스 선생님이 싫으냐>의 첫 대목은 이렇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하고 교장 선생님이 말했지만, 새학기가 되어도 희망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리츠코는 생각했다.
가정교사는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오고,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학원에 가야 하고, 4학년이 되었는데도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할 수 없다.
"다 너를 위해서야." 엄마는 입만 열면 이렇게 말한다.
전형적이다. 지난 수년 간 읽어본 우리나라 동화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이 꽤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원 뺑뺑이를 돌고 저녁은 학원가의 식당에서 해결하며 새벽 2,3시까지 학원 숙제를 한다는 풍문은, 풍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이렇지 않은 아이들도 물론 있지만 문제는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1930년대(!)에 태어난 일본(!) 작가가 쓴 작품이 바로 이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짚고 있다는 것. 심란하고 심각하다. 한국을 포함해서 많은 사회들이 일본에서 진작에 시작된 이 병적인 현상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니까.
또 하나, 전형적이라고 느낀 점이 있다. 작가의 시선 혹은 시선의 색깔이라고 해야 할까, 방향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 역시 기시적이다. 한국 동화 작가들의 서술 방식이나 서술 내용과 참 유사하다. 어른들의 과도한 욕심에 짓눌리는 어린이들을 '대변'하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어른이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동심의 세계를 정답처럼 설정해놓은 듯한 느낌을 막연히 받았다. 선하고 착하고 눈처럼 순수한, 하지만 약하고 다친, 동심.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아이들을 외부에서 바라보고, 그들은 약하고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묘사한다. 아이들 스스로는 자기들이 약하고 상처 받은 작은 새처럼 바라봐지기를 원할까? 혹시 아이들은 "나는 그냥 새예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 새 말예요!" 하고 말하고 싶지는 않을까? 아무 수식도 붙지 않은, 그래서 모든 수식이 붙을 수 있는, 그냥 '새'. 약하다는 말도, 아름답다는 말도, 부담스러운, 그냥 '새'로 그려지는 아이들이 나는 좋다. 작가가 이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이 느끼는 대로, 그들의 생동하는 힘을 직접적으로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 3자의 거리감 없이, 이상적인 교육자이자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의 관념적 색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내 개인적 생각일 뿐이고, 어쩌면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일본 문화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상당히 묘한 분위기가 하다. 자폐적이면서 호의적이고 독립적이면서 협조적이고 규범적이면서 규범파괴적인 모순이 있다. 병적으로 완벽성을 추구하고, 그래서 동심조차 완벽하게 순수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일본 문화를 접할 때면 한국 문화만의 특성을 더 잘 알 것만 같다. 소탈함. 뒤틀리지 않고 시원시원한 느낌.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은 이런 소탈함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의 정서를 '한'이라고 한다지만 나는 글쎄요... 동의하지 않는다. '한'의 정서는 일본과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참, 그러고 보니 <바다는 눈물이 필요 없다>도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작가도 말했듯이, 소설의 배경은 집필 당시에는 (그 당시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인데)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일본 모습이다.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 같다. 문명의 발전, 과학의 발전으로 세상은 좋아지면서 동시에 나빠지는데, 한 손으로 그린 그림을 다른 한 손으로 지우는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 우리 인간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