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 일인지 강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무조건 끌렸다. 지금도 그렇다. 깊은 산 어디에 작은 시원이 숨어있어 물은 시작되고 작은 물길을 이루며 흐르고 흐르고 흘러간다. 물길은 모든 물을, 작고 큰, 깨끗하고 흐린, 조용하고 시끄러운 온갖 물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며 점점 커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큰 하구를 열어 바다로 자신을 남김없이 풀어놓는다.
여기에 강을 이야기하는 그림책이 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에 작은 강이 흐른다. 그림책의 영어 원제는 Letting Swift river go. 스위프트 강을 놓아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건 사랑이 깊은 나머지 강을 붙잡고 보내주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다. "강을 가게 해 줘, 놓아줘, 더는 잡지 마, 가야 할 곳으로 강을 놓아주렴."
이 그림책은 저수지에 수몰된 작은 마을과 그곳 사람들에게 헌사된 이야기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그곳에는 아름다운 강이 흐른다. 마셔도 되는 맛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스위프트 강. 강을 끼고 사람들은 정답게 살고 있다. 교회와 방앗간이 길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놀기 위해 네거리에서 만난다.
그림책의 주인공 섈리 제인은 친구들과 도시락을 싸서 공원묘지로 소풍을 가고, 뒤뜰 단풍나무 아래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면 멀리서 기차 소리가 울리고 가끔은 올빼미 기척도 들을 수 있었다. 침실 창가에는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스치며 불어 들어오고 겨울이면 아빠가 작은 호수에서 얼음을 잘라왔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고 전격적인 변화가 평화로운 일상을 전복시킨다.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 일대에 저수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깨끗하고 맑고 맛 좋은 강물을 내어주는 대신에 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샐리 제인의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을 이전하고, 아이는 가족 같았던 늙은 나무와 이별했다. 집도 방앗간도 교회도 학교도 허물어졌다. 친구들과는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안녕이란 말을 할 새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른이 된 샐리 제인은 아빠와 이곳을 찾아와 저수지로 배를 타고 나간다. 아빠는 물 밑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저길 보렴, 샐리 제인.
프레스콧 마을로 가던 길 자리야.
저긴 비버 시냇가 가던 길 자리고,
저긴 네가 세례를 받은 교회가 있던 자리란다.
학교가 있었고, 마을회관이 있었고, 오랜 된 돌집 방앗간이 거기 있었지.
다시는 그 모든 걸 못 보게 됐구나."
샐리 제인은 물밑으로 아스라이 마을의 윤곽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옛 모습을 읽어내긴 어려웠다. 이제는 물고기들 차지가 되어버린 옛날 길들. 날은 차츰 어두워져 밤하늘에 별이 떴다. 물에 반사된 별빛은 개똥벌레처럼 빛났고 두 손을 모아 강물을 뜨는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에 스치던 바람, 선로를 따라 달리던 기차 소리, 친구들을 만나던 네거리, 지금은 가 버린, 물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간 모든 것. 그리고 물에 잠긴 세월 저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똥벌레를 잡아 병에 가두던 자신에게 했던 엄마의 말이었다.
"놔주렴, 샐리 제인."
샐리 제인은 점점 검어지는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강물을, 개똥벌레를, 별빛을, 소중한 추억들을, 흘러간 시간을 샐리 제인은 놓아주었다.
인간 사회의 발전사를 놓고 어둡고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책은 퀴빈 마을 역사 연구 협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글 작가와 그림 작가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결로 풀어내서, 사랑과 애도에 초점을 맞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가요는 노래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사소한 볼펜이며 시계도 잃어버리면 섭섭하고 오래 탄 자동차를 보내주는 일은 더 가슴이 아린 일인데, 하물며 깊이 미워하거나 깊이 사랑한 인연을 떠나보내기는 너무 어렵다. 작게든 크게든, 얕게든 깊게든, 내 마음의 일부가 같이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아프다. 마음이 떨어져 나간 생채기에서는 피가 흐르고 상처는 오래, 마치 영원처럼 오래, 아물지 않는다.
샐리 제인은 스위프트 강 아래 잠긴 고향의 모든 것, 고향에서의 모든 아름다운 기억과 시간을 잊어야 했을까? 이제는 없는 그것을? 엄마의 말씀은 잊으라는 얘기가 아니었으리라. 개똥벌레는 병 안에 가둬질 존재가 아니고, 별이 있을 자리는 별빛 반짝이는 밤 강물이 아니라 하늘이며, 강물은 흘러가야 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며,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그림책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차분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까지 샐리 제인의 마음속에서 스위프트 강은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의 저편에서 엄마가 강을 놓아주라고 한 걸 보면.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처럼 들렸지만 실은 강의 목소리였는지 모른다. "나를 놓아줘, 샐리 제인. 나는 흘러갈 테야. 나는 강이니까."
그림책 표지를 본다. 아이가 다리 위에 서서 작은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이 뒤로는 정겨운 마을이 보이고 강가에는 나무가, 언덕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길이 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풍경은 이제 없다. 이곳으로 가려면 샐리 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처럼 풍경이 들어있을 것이다. 현실에는 이미 사라져 버린 풍경. 이 그림책은 수몰 마을의 역사를 한 장 한 장 넘기듯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역사는 샐리 제인의 마음속에서 재현되는 개인적 아픔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감아 그림책의 첫 장에서 마지막 장으로 과거의 시간들이 천천히 불려 나온다. 애도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위해, 놔주어야 할 지점으로 이르기 위해, 책장은 한 장씩 넘어가고, 이야기는 되감기고 다시 풀려나온다. 현실에서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회상의 과정. 여섯 살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의 긴 세월. 계속 반추될 기억들.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따라 흐르는 것 같다. 강물이 이토록 내 마음을 이끄는 건 부드러움과 한없는 포용도 있지만 흘러간다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이지 싶다. 흘러서 간다는 것. 자신을 다 풀어놓을 곳까지 흘러가는 것. 한때 강이었던 존재가 마침내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무한히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강에 끌리는 까닭은 아마도 자유에 대한 끌림이 아닐까 막연히 짐작한다.
가요가 가슴에 깊이 와닿는 나이가 있다는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는 가사가 이렇게 진실로 들릴 줄이야. 나이가 든 것이다.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나이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