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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모험 ㅣ 비룡소 걸작선 56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카를로 콜로디 글,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관광상품으로 피노키오 인형이 사방에 보였던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작가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렌체 출신이었다. 그는 1800년대 초중반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이탈리아가 성립한 뒤에는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로 방향을 바꿨다. 곧바로 연상되는 우리나라의 작가가 있다. 방정환.
막 성립한 나라, 아직도 혼란 정국이었을 나라,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험난한 여정과 통일 이후의 흥분과 낙관으로 들떠있었을 나라, 그리고 어린이들의 처지는 틀림없이 너무나 열악했을 나라. 방정환처럼 콜로디 역시 이탈리아의 어린이들에게서 연민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지 않았을까.
피노키오 이야기는 삽화적인 짧은 사건들이-어찌보면-약간은 즉흥적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이 작품이 어린이용 신문에 짧게 연재됐던 동화였다는 사실, 그리고 어린 독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따라가고 있는 큰 틀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자유와 유혹, 시련과 극복이다.
인형, 그것도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진 피노키오가 갑자기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나 이 아이가 끊임없이 유혹에 넘어간다는 점,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상어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작가의 사상적 배경이 기독교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런 배경 위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열심히 배우고 정직하게 일하는 가치'인 것 같다. 이제 막 통일이 된 나라에서 당연히 가장 필요한 가치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이 가치를 구체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고, 작가의 고유한 인간성이 엿보인다. 피노키오를 끊임없이 시달리게 만들었던 주변의 유혹들은 얼마나 음흉하고 폭력적인가. 동시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피노키오에게 충고하고 도움을 주는 선량한 힘들도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지만 꼭 그렇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사람은 약하고 어리석고, 다행히 세상에는 선량한 손길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품 말미에 결국 피노키오는 사람 아이가 되는데, 이것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환(!)되는 것을 연상시킨다. 긴 시련을 거쳐 사람 아이가 된다는 것, 이것은 새로운 또 한 번의 탄생이다. 그리고 피노키오는 예전에 자신이었던 꼭두각시 인형을 바라본다. 그 인형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팔을 달랑달랑 매단 채, 한가운데에 다리를 십자로 꼬고 서 있었는데,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해 보였다.' 피노키오는 그 인형을 바라보며 말한다.
"내가 꼭두각시였을 때 얼마나 우스웠을까!"
말썽을 피우고, 계속 어리석은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꼭두각시 짓은 분명 우습긴 했겠지만, 결국 사람 아이로 변할 수 있었던 내면의 힘, 순수한 정신, 따뜻한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던가. 그것 역시 꼭두각시 인형의 안에 있었다. 아이든 어른이든, 고래 뱃속에서 뜨겁게 삶긴 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구 뒤에는 어리석은 꼭두각시 짓을 그만 하고 싶다는 괴로운 자각이 있지만, 나는 그래도 피노키오가 꼭두각시 인형이 되기도 전의 그 평범한 나무토막-갑자기 떼굴떼굴 굴러서 노인을 찾아온, 말하는 그 나무토막에게 무한한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이것은 일종의 퇴행적 감정일 게 틀림없는데, "진짜 사람이 되다니, 정말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 아이 피노키오는 이제 다시는 재탄생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아이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하자면 재미가 없는 아이이고 왠지 사랑스럽지도 않다. 결국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서, 혹은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혹은 철학의 완결을 위해서 나아가지만, 그 끝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삶의 재미와 동력과 의미를 얻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