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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평점 :
<나무 위의 남작>을 매우 색다른 느낌으로 읽었다. 내용뿐 아니라 문체도 독특하고 신선하며 가벼우면서도 진지하다.
배경은 1700년대 중반의 이탈리아로 추정되는 가상의 지방 옴브로사. 저자 칼비노가 활동했던 시기는 1900년대 중반의 이탈리아이므로,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200년도 더 이전의 과거를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옴브로사라는 지방은 가상의 공간이다. 칼비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자유롭게 펼쳐놓기 위해서 과거의 가상의 공간 속에서 기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을 택했다.
칼비노는 코지모의 가족 구성원을 통해서 당시 사회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작이 되기를 열망하는 남작인 아버지는 구시대적인 인물들을, 전쟁에만 관심이 있는 어머니를 통해서는 개인적인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패권주의를, 기괴한 취미를 가진 인물로 인간적인 감정을 결여한 누나나 자기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삼촌을 통해서는 인간적인 연대감을 상실한 개인주의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중 인물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섞여들기 힘든 조건이었으나,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 사회 참여적이고 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나 역설이야말로 때로는 진실을 명료하게 전달한다. 칼비노는 글 중에서 말한다.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라고. 칼비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기능은, ‘아주 강한 인간을 만들어내고 개개인의 훌륭한 소질을 부각시키며 드물기는 하지만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기쁨과 정직하고 착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일인지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비노에 따르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삶은 한편으로는 ‘공동의 문제가 해결되어 아무런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면... 지도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소설이 전달하는 주제는 매우 진지하고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옮긴이가 말하는 것처럼 우화적이다. 도대체 나무 위에서 일생을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말이다. 우화의 형식을 취한 덕분에 이야기는 무거운 주제를 가벼우나 경망스럽지 않게 전달할 수 있었다.
소설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작가가 코지모를 매우 인간적이고 지극히 자유로우면서도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이 결함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 글 자체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 독자의 머릿속에 옴브로서의 풍경을 고스란히 들여놓는 놀라운 묘사력, 그리고 유머다. ‘그때부터(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뒤부터) 이런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남작님이 미쳤대!” 그러자 사려 깊은 사람들이 덧붙였다. “항상 미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또 미칠 수가 있지?(p.309)”’ 같은 대목이나, “(코지모는 사냥을 좋아하지만 나무 위에서 사냥을 하려면 사냥물을 물어올 개가 있어야 했는데) 사냥꾼 생활을 할 때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보완물, 즉 개가 형에게는 없었다. 대신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공중에서 형의 총에 맞아 떨어진 개똥지빠귀와 도요새, 메추라기를 찾기 위해 관목 숲의 가시덤불에 몸을 던졌다.(p.128)”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어찌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무 위의 남작>을 읽는 내내, 세상에는 있지도 않는 공간 옴브로사에 머물며 그곳의 향기로운 공기를 흠씬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상쾌하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