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우 치는 밤, 작은 오두막에 두 동물이 비를 피해 들어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자 마음은 불안해지는데, 누굴까, 주저하다가 둘 중 좀 더 친절한 동물이-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여는 존재는 대체로 약자인 것 같다-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비바람이 정말 대단하지요? 그러자 상대가 화답했다. 아이고! 이런, 실례했습니다. 깜깜해서 누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어둠 속의 주인공들은 늑대와 염소였다. 작가 키무라 유이치는 잡아먹는 늑대와 잡아먹히는 염소를 한 공간 안에 들여놓음으로써 흥미진진한 상황을 연출했다.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가 닫힌 공간에서 대면하는 설정은 이야기 작법에서 흔하고 어린이문학에서도 즐겨 쓰인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면에서 키무라 유이치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과감하며 철학적이다.
<폭풍우 치는 밤에>는 총 일곱 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책으로 시리즈의 이름은 '가부와 메이 이야기'다. 가부는 늑대, 메이는 염소다.

메이와 가부는 어둠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서로 사는 곳이 가깝다는 얘기, 맛있는 먹이 얘기, 맛있는 먹이가 많은 산들산들 산에 대한 얘기 같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얀 염소와 늑대는 그들 엄마가 빨리 달리라는 똑같은 잔소리를 한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는데, 둘의 관계를 정작 주인공들만 모르고 독자는 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묘미다.
밖에선 아직도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밤이 깊어지며 배는 점점 더 고파오는데 두 친구는 이야기로 추위와 외로움과 배고픔을 잊는다. 작가는 서로에게 정체를 알려줄 듯 말 듯 끝까지 팽팽하게 긴장을 가져간다. 늑대의 발이 우연히 염소의 몸에 닿고 염소는 복슬한 털의 발 주인을 상상해본다. 혹시? 걸걸한 목소리도 미심쩍다. 하지만 염소는 곧 마음을 돌린다. 설마, 아니겠지 하며. 그때 문득 번개가 번쩍 내리치며 오두막을 환하게 밝히는데, 둘은 공교롭게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둠은 상대의 정체를 숨겨주며 오로지 이야기만 남긴다. 오로지 이야기만을.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진실로 들어가는 가장 곧은 길 같을 때가 있다. 하하하, 우리는 닮은 데가 정말로 많네요. 하하하. 깜깜해서 얼굴은 안 보이지만, 얼굴도 진짜 닮은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는 감탄스럽다. 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작가는 염소와 늑대에게 서로의 얼굴을 보여줄 듯 말 듯하다가 끝내 사실을 모르도록 이야기를 끝내고 다음 권으로 이야기를 넘긴다. 폭풍우가 그치자 염소 메이와 늑대 가부는 헤어지면서 다음 날 낮에 만나자고 약속한다.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둘은 순수하게 기뻐한다.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정말 운 나쁜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친구를 만났으니 오히려 좋은 밤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내일 낮에 만날까요? 우리는 서로 얼굴도 모르잖아요. 그럼, 우리 암호를 '폭풍우 치는 밤에'로 하지요.
우리는 순수함을 주로 흰색에 비유하지만 이렇게 새까만 어둠도 순수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는 보여준다. 순수함의 핵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듯이.
이어지는 시리즈는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 먹고 먹히는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순탄할 수 있을까. 숲 속 동물 사회에서 둘의 관계는 화젯거리가 되고 시선은 곱지 않다. 둘이 친구가 되는 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늑대 무리와 염소 무리는 분노한다. 어떻게 먹이와 친구가 된단 말이지? 어떻게 우리를 잡아먹는 적과 친구가 돼? 게다가 늑대는 염소에게 사냥 시간과 장소를 몰래 알려줄 수 있고 염소 역시 늑대에게 염소 무리의 위치를 귀띔해 줄 수 있으니 둘은 내통자라고 두 무리는 단정해버린다. 다른 여지는 없다.
이렇게 위태위태한 상황 속에서도 메이와 가부는 서로에게 좋은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보름달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절벽이 있어. 거길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 자라는 산에 가보지 않으련. 우리는 좋아하는 친구와 좋은 걸 나누고 싶으니까. 위태로움은 외부에도 있지만 자기 내부에도 있다. 염소 메이는 늑대 친구가 혹시 자기를 잡아먹지 않을까 문득문득 두려워하고 늑대는 자꾸만 염소 친구가 맛있는 먹이로 보인다. 정말 괜찮은 애야. 먹어도 맛있겠지만... 그런데 같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단 말이야. 음, 맛도 좋겠지! 그래도, 어? 귀가 쫑긋 움직이네. 조금만 깨물어 볼까? 친구니까 한쪽 귀만 맛보라고 하면 좋을 텐데. 아, 정말 배고프다.
이야기는 점점 파국을 향해 간다. 늑대 무리는 가부에게 염소가 어디에서 먹이를 먹을지 알아오게 시킨다. 염소 무리도 메이에게 늑대들이 언제 어디에서 염소 사냥을 할지 알아오게 시킨다. 둘은 궁지에 몰린다. 숲 속 모든 동물들이 주시하는 속에서 이들은 뭘 할 수 있을까. 도망치는 수밖에.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자신의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길 밖에. 둘은 결국 강 건너로 달아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 <안녕, 가부>는 강물에 뛰어든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둘은 기적적으로 거친 강물에서 빠져나온다. 숲 속 동물들은 둘을 지켜보며 속닥거린다. 늑대 무리가 자기네를 배신한 가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 걸 가부는 이 속닥거림으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늑대들은 세상 끝까지 가부를 쫓아가서 갈가리 찢어 죽이고 메이를 축하용 먹이로 쓰겠다며 떠벌리며 숲 전체를 뒤지고 있었다. 둘은 더 멀리 도망쳐야 했다. 메이는 가부에게 말했다. 달아나자, 가부. 저 산 너머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 너머는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대한 어떤 얘기도 전해지지 않았다. 산꼭대기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둘은 상상했다. 저 산 너머에도 푸른 숲과 폭신폭신한 풀밭이 꼭 있을 거야. 그래, 틀림없이 있을 거야. 둘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올라갈수록 험해졌고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늑대들이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둘은 몇 날 며칠을 눈 속에서 배를 곯으며 걸었다. 눈발이 둘의 몸을 휘감았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입도 벌리지 못할 정도로 거센 눈보라 속에서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늑대보다 몸이 약한 염소 메이가 추위에 먼저 쓰러졌다.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늑대 무리에게 잡아먹히든 얼어죽든 이제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메이는 가부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죽음을 앞뒀을 때 우리는 가장 진실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진실이 가장 또렷하고 맑게 보이는 순간은 죽음을 앞둔 때일 것 같다. 메이가 얘기했다. 친구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고, 내 목숨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친구를 만났다고.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나를 먹고 건강하게 이 산을 넘어서 푸른 숲으로 가라고.
가부는 당연히 메이를 먹을 수 없었다. 자꾸만 메이가 먹이로 보이긴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대신 목숨을 주어도 좋을 친구라는 말이 가부를 흔들었다. 산 아래에서 늑대들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메이는 눈구덩이에 누워있었다. 메이를 살리기 위해 가부는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가부는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커다랗게 울부짖으며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가부의 몸은 하얀 눈덩이가 되어 구르고 굴러 작은 눈사태를 일으켰습니다. 눈이 연기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폭풍이 되어 모든 것을 죄다 집어삼키며 내려갔습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쳤고 저 멀리 푸른 숲이 보였다. 눈보라 속에서 가부와 메이는 높은 산을 넘었던 거였다. 메이가 소리쳤다:
가부. 숲이 보여. 푸른 숲이 진짜 있었어. 가부, 빨리 와 봐. 우리가 산을 넘은 거야. 가부! 가부! 메이는 그칠 줄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가부를 불렀습니다.
<안녕, 가부>는 이렇게 이야기를 맺는다. 우리말에서 안녕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공통으로 하는 인사인데, 가부에게 하는 안녕은 헤어질 때의 안녕이었다. 슬프게 안녕을 하는 이야기. 어린이문학에서, 그것도 아주 어린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서 이렇게 슬프게 이야기를 끝내는 법이 있냐고 작가가 항의를 받지는 않았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은 건, 삼 년 뒤에 나온 시리즈의 마지막 권 <보름달 뜨는 밤에>는 푸른 숲에서 친구를 그리워하며 홀로 슬프게 지내던 메이 앞에 기적적으로 가부가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행복하게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전형적인 옛날이야기처럼 말이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행복은 무조건 이야기의 결론이어야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과연 그래야 할까, 다시 생각해 본다. 이야기로 은유되는 우리의 삶은 무조건 괜찮아야만 할까?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보고 나오며 무의식 중에 떠오른 말이 있었다. 우리는 괜찮고 또한 괜찮지 않다.

저 소녀의 이름은 주인이다. 영화 제목 <세계의 주인>의 주인은 주인공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주인임을 말하고 있다. 열여덟 살 주인은 어릴 때 성폭행을 당했다. 주변의 몇 사람만 알고 있던 이 사실은 영화 중반을 지나서야 밝혀지지만 영화가 하려는 말은 영화 초반에 이미 말해진다. 성폭행범 거주반대 서명운동을 하는 친구에게 주인은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문구를 명확하게 짚어서 말한다. 성폭행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건이 아니라고. 나는 성폭행이라는 단어 자리에 다른 말을 넣어도 이 명제는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위험하고 수많은 위협이 우리를 넘본다. 가난과 폭력과 재난과 부조리와 인간 본성의 어쩔 수 없는 야수성 같은 것들 앞에서 인간은 대책이 없다. 인간은 서로에게 늑대가 되고 염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고, 피해자의 영혼은 그것들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이 말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일종의 러시안룰렛과도 같아서, 어떤 경우에는 그것들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피해자의 영혼은 그것들로 인해서 완전히 파괴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다짐하며 외친다. 잘 살아내겠노라고. 삶은 불행한 사건 속에서도 눈부시도록 빛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노라고. 마치 <댈러웨이 부인>의 첫 구절처럼 소녀는 삶의 생기로 터질 듯하다:
꽃은 자기가 사 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루시는 루시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들도 떼어내야 했고, 럼플메이어에서 사람들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생각했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어떤 불행한 큰 사건이 개인에게 닥친다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뒤는 같을 수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남긴다. 우리의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깊고 때로는 얕을지언정. 어쩌면 사건으로 채워지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들을 파도처럼 넘어가며 우리는 살아간다. 수없이 반복하며 씻어내고, 파괴되어도 다시 회복해 가면서.
이 영화에서는 바흐의 <사냥칸타타> 9번 곡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가 반복적으로 흐른다. 바흐가 독일 바이마르공국의 작센을 통치하는 크리스티안 공작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칸타타 중 이 9번 곡에는 가사가 붙었다. 좋은 양치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들은 평화로이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바흐는 은근하게 권고한다. 그러니 통치자여, 당신의 백성들을 잘 다스리시라. 제목은 주로 '양들이 평화로이/한가로이 풀을 뜯고'로 번역되지만 원문은 '안전하게'다. 안전하면 평화로울 수 있을 테니 번역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평화는 더 궁극적인 상태고 안전은 지금 당장의 내 환경과 직결되는 문제다.
영화에서 이 곡이 흐를 때마다 눈물이 났다. 괜찮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이 연약한 소녀를 위해서 올리는 기도처럼 노래가 들려서였다. 양들이 안전하게 풀을 뜯게 해 주소서, 양들을 보호해 주소서, 이 소녀를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소녀를 위해 웁니다. 소녀로 대변되는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성모마리아는 죽은 예수를 안고 우신다. 성모의 눈물은 크고 깊은 슬픔의 강물이 되어 이 세상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한다. 우리의 눈물이 슬픔의 큰 강으로 흘러들어가 위로받는다. 그래서 성모는 영원히 슬퍼하시는 거라고 나는 느낀다. ’성모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다. 세상에 슬퍼하는 이들이 있는 한, 성모는 끝없이 슬퍼하신다. 크고 깊은 슬픔으로 우리들의 슬픔을 품어주신다.
우리는 괜찮고 또한 괜찮지 않다. 일본의 어린이문학 작가 키무라 유이치는 과감하게도 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그림책으로 전하고 있다. 어쩌면 우정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남은 친구가 '그칠 줄을 모르고 언제까지나' 떠난 친구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는 안타까운 사실을. 행복한 어린이는 이 이야기를 무서워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아파서 슬픈 아이는 오히려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메이의 울음 속에서 자신의 눈물이 녹아드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안심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내 슬픔이 더 큰 슬픔 속에서 감싸이고 위로받는 것 같은 느낌과도. 슬픔을 따뜻이 감싸 안을 수 있는 건 실은 행복이 아니라 슬픔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가 <안녕, 가부>로 마무리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메이는 끝도 없이 울고-영화에서 주인이 세차장에서 차가 세차장을 통과할 때 엄마를 원망하면서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이 있는데 이 감정 폭발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으리라는 걸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절대 영영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도 언젠가는 훌훌 털고 일어나 그다음 걸음을 뗄지 모른다. 하얀 염소는 눈물을 닦고 푸른 숲으로 갈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염소가 그럴 수 있기를 마음으로 기원하리라. 하지만 등을 떠밀고 싶진 않다. 슬픔을 빨리 털어버리라고, 친구의 죽음을 빨리 잊으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다만 기도할 뿐이다. 신이시여, 어린 양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 같이 울어주소서라고. 충분히 위로받고 나면 털고 일어날 힘이 생기는 법이다. 기원전 8-7세기에 유다 왕국이 위태로울 때 예언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도 먼 먼 이상향의 약속이 아니라 기도가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이사야의 예언이 슬퍼하는 이들을 깊이 위로하는 기도의 말로 들린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나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사야 6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