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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펌 -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삶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계발서가 지겹다면, 자기계발서가 쓸데없다는 걸 알고 있다면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 아니 ‘자기계발’을 비판하는 책이다.
항상 긍정적이어야 하고, 나긋나긋한 사람이어야 하고, 새로운 걸 거침없이 시도할 수 있어야 하고, 뭔가 계속 배우고 채우고 발전해야 한다는 말에 지치는 시대다. 이 책은 그런 말들을 철학으로 시원하게 꾸짖는다. 그런 말들이 왜 나쁜지, 그 이면에 어떤 배경이 숨어있는지도 짚어본다. 그런 말들이 어떻게 삶의 뿌리를 흔들고 누군가에게, 조직 사회에,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게 만드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자아실현 쓰나미는 고분고분하고 유연한 노동력을 원하는 시장의 요구를 지원하고 부추겼다. … 자아실현은 더 이상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직장에 도움이 되도록 계발하고, 심지어 자본으로 삼아야 하는 내면의 자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제도에 대한 진짜 저항은 자아든 무엇이든 찾기 위해 우리 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자아를 찾고 계발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도 떳떳하게 사는 길에 있다. p55.
삶은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최선의 삶’이 따로 정해져있으며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 ‘피리 부는 사나이’를 속절없이 따라가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진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아무리 뜨겁게 내달려도 결국 누군가의, 조직의, 자본의 ‘충실한 노비’가 될 뿐이다. 자기 스스로 단단하게 빚은 정체성도 없이 남의 말대로 따라다니는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글쓴이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다. 휘둘리지 말고 자기의 뿌리를 내리라 한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계발서가 해법을 일러준다면, 철학책은 태도를 고민하게 한다. 해법이 남이 정해놓은 답으로 이르는 길이라면 태도는 나의 정체성을 쌓아올리는 디딤돌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몇 백 곱절은 어렵다. 명쾌하고 간단하게 말하는 자기계발서보다 어려운 말로 아리송하게 더듬거리는 철학책이 이해하기 어렵듯이. 그렇다면 철학을 가르쳐주는 책보다 철학으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은 어떨까?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하게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이 무척 반가웠다.
우선 아래 두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는 투덜댈 수 있는 권리를 지켜야 한다. 투덜댄다고 긍정적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지라도 투덜댈 수 있어야 한다. p86.
인생이 힘든 건 진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힘들지 않은 척 살아야 하는 게 문제다. … 불평과 비판은 단지 상황을 견디는 방법만은 아니다. 투덜댈 자유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라야 우리는 일종의 인간적 존엄을 갖출 수 있다. p85-86.
우리 일상에서 ‘투덜대기’는 죄악이다. 투덜대는 사람은 아무도 좋게 생각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투덜대기는 죄악이 아니라 해방이고 존엄성이다. 일상이, 사회가, 조직과 집단이 마냥 좋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좋지 않은 상황을 좋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는 언뜻 듣기에 그럴듯할지 몰라도 대부분 문제 상황을 마주보지 않고 도망가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그렇게 도망만 다닐 수 있을까? 마주 봐야 한다. 나쁜 건 나쁘다고 떠들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한다.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존엄하고 성숙한 사람이다. … 아이의 입에서 처음 나온 ‘아니요’는 성숙과 독립을 향해 내딛는 중요한 첫 걸음을 의미한다. … 이런 저항은 자율성을 향한 첫걸음이다. p100.
존엄함이란 최신 유행을 좇는 대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존엄함은 시간과 상황을 초월하는 일관된 정체성을 구축하고 지키려는 노력이다. 존엄함의 반대는 노상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p101.
우리는 부정보다는 긍정이 옳다고 가르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긍정보다 부정이 옳을 때도 있다. 뭔가를 부정한다는 건 타자의 압력으로부터 자기가 믿는 바를 지켜내는 행위이기도 하니까. 모든 제안과 요청에 “예”라고 말하고 모든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는 있어도 자기를 지킬 수는 없다. 글쓴이는 자기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뭔가 대답하기 전에 한숨 돌리면서 의심해보는 일이라 한다.
의심할 때 우리는 으레 ‘글쎄요’라고 답한다. 그러니 ‘글쎄요’라는 대답을 늘 준비해두라. 달리 말해, (검증되지 않은 확신으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냥 놔둬라. p110.
그럼 뿌리를 어디에 내려야 할까? 흔히 볼 수 있는 책들은 그 뿌리를 내 안에 굳게 내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를 좀 더 발전시키고 뭔가를 더 배우고…. 아. 이래서는 또 반복이다. 글쓴이는 답을 ‘나’에서 찾지 말고 ‘밖’에서 찾으라 한다. 나를 발전시키고 나를 채우고 나를 바라봐도 내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라는 옹색한 껍데기를 벗어나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내 안으로 파고들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고 같이 서있을 수 있는 나무를 찾는다면 어떨까? 답은 나무 한 그루에 있는 게 아니라 숲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안이 아니라 밖을 쳐다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문화, 자연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열쇠가 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자아’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문화사의 구성물이자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우리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 p45.
사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에는 본질적인 가치가 별로 없다. 반면에 우리와 서로 연결된 사람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책임을 다하다보면 우리가 ‘진짜’ 우리 자신인지 아닌지는 사실 의미가 없어진다. p60-61.
우리는 내면의 자아나 일련의 틀에 박힌 성격 특성들로 ‘우리가 누구인지’가 본질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에 익숙하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약속과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무는 그냥 그냥 귀찮지만 해야할 일이 아니라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근본적으로 누구인지를 표현하는 일이다. p212-213.
글쓴이의 재료는 스토아 철학이다. 책을 읽다보면 에픽테토스, 세네카, 아우렐리우스 같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말도 만날 수 있다. 글쓴이는 왜 고대 철학을 다시 들고 나왔을까?
고대 그리스인은 폴리스라는 자그마한 공동체 울타리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나타나 그 울타리를 부수었다. 망가진 울타리 바깥에 광대한 제국이 있었다. 안락한 공동체를 떠나 바깥세상에서 떠다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넓은 세계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헬레니즘 제국, 그리고 그 뒤의 로마 제국 시대에도. 이렇게 스토아 철학이 태어났다.
우리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는 닮은 점이 많다. 끝이 안 보이는 세계 앞에 내던져졌다는 점에서, 특히 마음껏 노닌다기보다는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파도에 휩쓸려 다닌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으로 답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길을 찾고 걸어가는 태도가 어때야 좋을지를 알 수 있는 지도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도 나를 쉽게 흔들지 못하게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야겠다. 아니, 나부터 나를 그만 휘두르는 게 좋겠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에 따르면 지나치게 바쁜 사람은 과거를 응시하지 않는다. … 동시에 이곳저곳에 있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단단히 서 있지 못한다. … “침착하고 잔잔한 마음은 삶의 구석구석을 산책할 힘이 있다. 그러나 너무 바쁜 마음은 무거운 멍에를 지기라도 한 듯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어두운 나락으로 사라져버린다.”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