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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당신을 위하여 - 철학 ㅣ 범우문고 15
루이제 린저 지음, 곽복록 옮김 / 범우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제목만 보고 끌리는 책이 있다. “고독한 당신을 위하여”라니. 왠지 나 같은 사람-찬바람을 피해 전기장판 끌어안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34세 남성-이 보라고 쓴 책 같다. 무슨 내용이 들었을까?
저는 혼자서도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 때 한 번도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습니까? 울적한 기분에서 술을 마셔본 적이 없습니까? 당신은 생의 두려움을 막기 위해 자극을 주는 약물을 복용해 본 적은 없습니까? 아무 것도 생각하기가 싫어 미친 듯이 자동차를 몰아본 적은 없습니까? 당신의 근면한 활동, 잘난 체 하는 행위 등은 결국 당신이 이렇다고 꼬집어 부를 수 없는 위험 앞에서 살려달라고 하는 절망적인 외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p19.
눈에 띄는 구절이 책 앞머리에 있다. 혼자 영화보고 울적한 기분에 술 마시고 하는 건 나도 해봤다. 마지막 문장을 곱씹어 본다. 왠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이렇다 꼬집어 부를 수 없는 위험이 무엇일까? 아마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것 같은 불안과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쭉 읽어보니 무척 종교적인 책이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라’로 끝난다. 나처럼 종교적이지 않은 속세 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종교 이야기를 걷어내고 읽으면 좋은 내용이 꽤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병들게 하고 외롭게 하는 게 무엇인가를 다룬 구절.
우울증과 히스테리는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한 개념입니다. 둘 다 마음이 ‘병들고’ ‘순조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며 마음이 너무 긴장하여 기대를 하거나 지나치게 갈망을 하거나 열띤 감정을 갖고 있는 것, 즉 자아광란狂亂에까지 이를 정도로 지나치게 자기 몰두를 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걱정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끝없이 자아의 주위를 돕니다. p63.
글쓴이는 우울증을 이렇게 진단한다. 한 마디로 우울한 사람은 너무 자기에게만 빠져 들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 같다. 자기 안의 세계에 묶여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갉아 먹게 되기 마련이니까.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병아리는 그 안에 갇혀 죽는다.
에고이스트란 자기의 자아를 유별나게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갖고자 원하면서 그것을 찾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려하나 제대로 못 찾는 사람입니다. 에고이스트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항상 확증을 받고 싶어 하며 몹시 예민합니다. 그래서 어떤 비평의 그림자도 그들에게는 절망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자신이 중요합니다. p135.
우울증, 자기중심, 이기주의는 실제로 거의 동시에 나타나는 특성이며 정말 기분 나쁜 것들입니다. p64.
너무 자기에게 몰입하면 불행해진다. 자기만 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외롭고 아플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외롭게 하고 아프게 찌른다.
나는 어땠는지 돌아본다. 힘들고 피곤하다고 내 감정과 내 상황만 살피며 지내지는 않았는지. 이불 밖은 위험하다지만 그렇다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눈과 귀는 바깥으로 열어 놓아야 제 몫을 다할 수 있다. 내가 스스로 만든 틀에 스스로 갇히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때 행복합니까? 나는 이럴 때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을 바라지 않거나 일에 몰두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때 행복합니다. 요컨대 어떤 인간이나 어떤 사건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겼을 때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완전히 자기 자신일 때만이 행복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을 때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때입니다. p136.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한 과중한 근심은 전연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무엇에 헌신할 때 사람들은 왜소한 자연의 한계선을 넘어서서 자신의 힘보다 훨씬 위대한 힘의 결합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기주의의 극복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사람이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며 어떤 이념의 힘에 의해 승화承華된 사람인 것입니다. p68.
하지만 글쓴이가 내놓은 처방은 왠지 마뜩치 않다.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을 때에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문장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나보다 더 큰 세계에 발을 들이고 힘껏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모든 걸 내던지면 어떻게 될까? 일 잘 하고 사람 잘 챙겨서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야 있겠지만 내 안은 텅 비게 되지 않을까? 그런 게 행복일까? 그런 게 충만함일까? 그러다가 결국 삶 자체를 공허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꽤 봤다. 나는 그런 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뭔가에 몰두하는 것만큼 나를 잘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 너무 내 안에 갇혀있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도 안 될 일이다. 무엇이든 균형을 맞춰야 한다. 나를 나보다 더 큰 무언가에 바치라는 말은, 조금 극단적으로 보자면 신에게 모든 걸 바치라고 외치는 광신도나 국가와 집단의 영광을 부르짖는 파시스트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물론 글쓴이는 그런 ‘불순한’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겠지만.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다만 윤리적인 삶을 종교적 관점에서 너무 딱 잘라서 말하는 게 불편하다. 도움이 될 말만 가려서 본다면 시간낭비를 하게 하는 책은 아니다.
‘죽음’을 주제로 쓴 구절이 마음에 든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본질적으로 외롭다. 우리는 죽음을 피하고 싶어서 외면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죽게 된다. 글쓴이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꿋꿋하게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귀담아 들을 말이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한번뿐이겠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번 죽습니다. 출생조차 말하자면 하나의 죽음입니다. 모체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춘기에 맞이하게 되는 유년 시절과의 결별, 처녀성의 상실, 성적 능력의 사라짐, 나이가 먹어 아름다움을 잃는 일, 자식들의 분가, 애인의 죽음, 환상과의 결별, 자기의 자질과 계획들의 포기, 이 모든 것들이 모두 그때그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이나 모든 체념도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별 없이는 발전이란 불가능합니다. 모든 결별은 잃음이면서 동시에 얻음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낯익은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고 변화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성장의 아픔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용감하게 그런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왜 최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합니까? p118-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