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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뉴스에서 매일 경제 이슈를 보도하지만 솔직히 알아듣기 힘들다. 듣고 있으면 어려운 숙제를 받아든 불쌍한 학생이 된 기분이다. 모르겠다. 그냥 세상 흘러 가는대로 끌려갈 뿐이다.
경제가 어렵단다. 철들고 나서 경제가 좋다는 뉴스를 한 번이라도 본 기억이 없다. 불황. 침체. 혼란. 실업. 대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할까? 다들 죽어라 일하는데 그 빛나는 성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우리가 열심히 노동해서 얻은 결실이라는 게 결국 끝없는 경기 침체라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마르크스 자본론 1권을 일독했다. 마르크스 경제학 해설서도 읽어봤다. 결론은 명백했다. 자본주의는 계획 없는 과잉 생산이라는 광란의 질주를 계속하다 주기적 공황을 반복하며 붕괴한다는 것. 아. 그랬구나. 그래서 경제가 이토록 불안한 거구나. 큰 흐름은 짚었다. 하지만 지금 겪는 경제 불황의 격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태인지,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뉴스에서 경제 관료와 분석가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들을 어디까지 믿어야하고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부족한 내 지능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좀 더 쉽게 접근하는 책이 없을까?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무척 쉽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낸다. 주로 2008년 경제 위기를 다루지만 현재의 경제 불황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참고할만했다. 경제학 책이지만 수식이나 복잡한 도표가 없어서 보기 편하다. 아주 간단한 계산식도 쓰지 않는다. 주로 여러 경제 지표 관련 통계 수치를 비교 분석해서 제시하고 근거로 삼는다. 숫자 울렁증 있는 내가 읽기에도 불편하지 않고 쉽다.
저자의 결론은 명쾌하다. 이 모든 게 1980년대 이래 세계를 지배한 ‘자유 시장 경제’ 때문이다. 정확히 자유 시장 경제 시스템을 굴리는 자들, 그 시스템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자들의 시커먼 거짓말이 경제를 망치고 극심한 실업과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만든다는 것.
일단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시장 또한 정치적 결정으로 만들어지고 굴러간다. 자유 시장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시장 법칙’은 사실 누군가의 정치적 결정일 따름이다. 그 결정은 철저히 부자-특히 금융 자본-의 이익을 위해 내려진다.
‘자유’를 외친다. 불필요한 규제가, 정부의 간섭이 경제를 망친다고 설파한다. 오로지 시장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돈이 움직여야 기업이 살고 국가도 산다고 한다.
무역 혹은 시장 이익의 독식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여러 규제를 철폐한다. 국적 없는 자본 이동을 위해 자본 시장을 개방한다. 효율적 금융 시장을 만든다며 위험한 금융 상품 판매를 막기 위해 걸어놓은 규제를 없앤다. 이렇게 금융 자본이 활동하기 좋은 생태계를 만든다. 그리고는 주주와 경영자의 이익 추구가 기업 운영의 기본 원리라면서 기술 개발 등의 장기 투자를 줄이고 당장의 주가 상승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단기적 투자에 집중한다. 노동자가 가져갈 몫을 줄이고 고용 안정성을 무너뜨린다. 한편으로 거시 경제가 안정되어야 경제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가혹하게 인플레이션을 억제한다. 물가가 안정되니 금융 투자 이익도 안정적으로 보장된다. 하지만 금리가 인상되니 실물 투자는 줄어들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장기적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 규제가 사라지니 자본은 제멋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단기 이익을 찾아 치고 빠진다. 경기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지옥도가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낙오한다. 하지만 이들이 힘든 이유는 자유로운 시장에서 알아서 자기 몫을 찾아 먹지 못하는 개인적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해둔다. 기회 균등에서 멈추지 않고 결과의 평등까지 인위적으로 챙기려하다가는 시장의 생명력을 침해하고 경제를 망칠 것이라 주장한다.
이 모든 게 결국 금융 자본을 틀어쥔 어떤 사람들을 위한 거짓말이다. 그 사이에 그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간섭과 규제를 이야기한다. 통계 수치가 말해준다. ‘큰 정부’가 강력하게 경제를 제어하고 계획하던 1950~70년대가 자유 시장 경제가 지배하기 시작한 1980년 이후보다 모든 면에서 더 ‘잘나갔다’고. 무엇보다 ‘살기 좋았다’고.
시장은 1달러 1표 원칙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계다. 그런 시장 법칙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결국 돈 많은 자들 위주로 결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1인 1표 원칙이 살아있는 정치 영역이, 선출된 권력인 정부가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 중요 규제를 살리고 일정 부분 경제를 정부가 계획해야 하며 강력한 재분배 및 복지정책으로 경제 성장의 심장을 건강하게 되살려야 한다.
장하준은 어렵지 않은 언어로 굉장히 중요한 개념들을 풀어낸다. 책의 여러 진단이 크게 와 닿았다. 일단 지난 정권과 현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 성장을 위해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왜 새빨간 거짓말인지 잘 알게 되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차례로 여러 규제를 없애던 그들의 모습. 성장을 위해서 규제 완화가 필수라던 그들의 논리. 하지만 정작 규제 완화와 장벽 철폐가 불러온 것은 성장이 아니라 침체였다. 경제 혼란의 와중에 배불린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그들이 지금도 권력을 잡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현 정부 정책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점을, 그들이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뉴스를 보면서 경제 정책을 어느 정도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현실적 대안이 무엇인지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경제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이다. 몰랐던 경제 개념어 몇 개를 알고 가는 것은 덤이다.
인터넷 발명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세탁기 발명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니라는 내용이 신선했다. 탈산업화 시대는 허상이며 제조업 기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시대를 잘못 읽고 있었나 싶었다. 이 나라, 한국 역시 제조업을 홀대하는 현실을 현실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정부 개입 경제 발전의 대표적 성공 모델로 박정희 대통령을 소환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맥락을 짚어내지는 못한다. 사람들을 중앙정보부로 통제한 사실을 ‘바람직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효율적이다’라는 뉘앙스로 풀어낸 대목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저임금‧저곡가 정책으로 고통 받은 당시 노동자와 농민의 아우성, 중앙정보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고문 받거나 짓지도 않은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억울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역사 서적이 아니라 경제 서적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독재를 미화하는 듯 보이는 서술은 좋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박정희 정부의 정책이 일본을 따라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굳이 일본 사례보다 한국 사례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정치적’ 의도가 궁금해진다.
교육 투자에 대한 관점 역시 수긍이 가지 않는다. 저자는 교육 투자가 경제 발전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지금보다 교육 투자를 줄이고 다른 ‘생산적’ 부문에 돈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는 정치가 개입하는 영역’이라면서도 정치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교육은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결론내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교육 받은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사회가 민주화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부의 경제 개입이 해법이라는 저자의 결론에 어느 정도 수긍한 나는 크게 실망했다. 경제를 계획하고 규제하는 정부가 비민주적이라면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그런 경제 ‘발전’을 좋게 볼 수 있을까? 이에 관해 저자는 박정희 대통령을 평가하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나는 그 결론에 반대한다.
책에서 비판하는 미국식 기업들은 대부분 주주 중심으로 돌아간다. ‘주주 자본주의’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그렇지 않다. 재벌 총수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장하준은 주주가 아닌 ‘기업가’가 지배력을 유지하는 기업 모델(특히 스웨덴 모델)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국 재벌 기업은 어떻게 봐야 할까? 긍정적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 매력적이다. 술술 읽다보면 경제학에 무지했던 사람이 경제 이슈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경제가 어려운 공식과 법칙으로 돌아가는 미지의 기계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인간의 정책적 결정이 돈의 흐름을 바꾼다. 경제는 결국 정치다. 정치가 곧 경제다.
좋은 책이다. 비판적으로 읽으면 더 좋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리를 찾으려면 공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장하준의 책은 괜찮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