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 신화·거짓말·유토피아
자미라 엘 우아실.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현정 옮김 / 원더박스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의 이 문장은 책을 펼친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야기와 함께 성장하고 이야기와 함께 묘지에 묻힌다.˝

무작위로 복잡한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사람은 좀 더 친절하게 정리 정돈한, 요약되고 윤색된 이야기를 만들어 세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잘 살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삶도 이야기로 만들어나간다.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는 다양한 버전의 각자의 영웅담은 곧 사람이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이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보물이자 보물 지도이며 보물을 찾으러 가는 여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누구이며 어떤지는 내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통해 확립된다.˝

세상은 이야기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틀로 만들어낸 가상 현실에서 살아가며, 어떤 이야기를 쓰고 읽느냐에 따라 ‘현실‘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의 인식론을 다루는 현대 철학과 뇌과학의 다양한 담론을 어렵지 않게 녹여낸 책이다.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집단과 사회를 만드는 이야기, 국가와 인간 세계를 만드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간다. 특히 나쁜 이야기들, 즉 사람들을 거짓으로 선동하는 이야기들에 우리가 얼마나 잘 꾀어드는지 중세 마녀사냥과 나치, 트럼프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대목은 꽤 읽을만했다. 저자의 박식함과 솜씨가 무척 훌륭하다고 느꼈다.

나는 앞으로 내가 상황을 어떤 이야기로 인식하려고 하는 건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오늘 하루, 일 년, 그리고 삶 전체를 어떤 내러티브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를 항상 의식하게 될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시간은 무척 값지게 남을 것이다.

탁월한 문장들이 참으로 많아서, 밑줄을 엄청 친 책으로 기억할 것 같다. 그러나 엉망인 문장들도 많아서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저자가 원래 이렇게 썼는지 아니면 번역을 성의 없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을 만나면 나의 독해 능력만을 탓했던 것 같다.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잘 읽히지 않게 쓴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럼 다시 읽어보고 싶다.

주제 의식이 이야기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까? 이 책의 짜임새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의 대단원이라고 할, 지금 세상의 이야기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으며 세상을 좀 더 나은 이야기로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저자의 대안을 제시한 끝부분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 대목들이 몇몇 눈에 띈다. 뭐랄까, 짜증 나게 구는, 교조주의자가 외치는 구호 같달까. 끝으로 갈수록 말이 좀 세다. 제 잘난 맛에 신나게 떠들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는 않는. 자기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사람이 듣길 원한다면 때때로 자기가 말하는 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뭐, 이 또한 저자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 따름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