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민주시민교육
심성보.이동기.장은주 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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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멋지게 극복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한국은 ‘국민’은 있으되 ‘시민’을 찾아보기는 힘든 사회라는 사실이 가장 큰 위기 상황이다.


국민은 피동적 존재다. 국가가, 정부가, 권력자가 정해준 정체성을 내면화한 존재다. 반대로 시민은 긍정적 존재다. 시민은 정체성을 스스로 찾는다. 국가나 민족보다 더 보편적이고 중요한 가치, 민주주의가 그들의 나침반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겨우 정상으로 돌려놓은 이 나라의 미래에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만들어가는 존재가 필요하다. 자기 삶에서 민주적 원칙을 스스로 구현하는 사람, 지배 받는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시민이 필요하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시민이 될 수는 없다. 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시민은 ‘형성’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p14.


국민이 만들어지듯 시민도 만들어진다. 대충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라는 공정에 맞춰 대량으로 찍어내는 게 국민이라면, 시민은 조각을 빚듯 정성을 담아 만들어져야 한다. 단 거기에 강압이나 강제가 있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에 맞는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 몸에 배인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클 수 있게 교육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견해나 입장의 다양성, 또 그에 따른 ‘갈등’이나 ‘논쟁’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아무런 갈등이 없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갈등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킨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갈등과 논쟁의 여지가 없는 원칙은 오직 ‘갈등과 논쟁이 그 본질을 이룬다.’는 원칙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P26.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때때로 충돌하는 것. 그러한 충돌을 위험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보여주는 지표로 여길 수 있는 사회. 논쟁과 갈등이 항상 있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줄 아는 사람. 갈등을 억지로 없애려 하는 게 아니라 갈등 상황을 성숙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내 입장과 상대 입장을 넉넉하게 품는 품성을 키우려 노력하는 사고방식.



민주 시민을 키우려면 교육부터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 교육 목표를 주입이나 교화가 아니라 학생의 자발적 ‘성숙’에 두어야 한다. 학생을 주어진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객체가 아니라 자기 가치와 입장을 만들어갈 주체로 봐야한다. 독일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 ‘정치교육’을 발전시켜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연합국은 독일 나치즘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막으려고 패전국 독일에 미국식 시민 교육 체계를 이식했다. 독일의 정치교육(즉, 민주시민교육)은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구 민주주의 정치, 사회 제도를 잘 전달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68혁명의 열기가 독일을 휩쓸면서 정치교육의 흐름도 바뀐다. 사회 비판과 변혁을 강조하는 좌파의 입장과 체제 유지를 원하는 우파의 입장이 정치교육의 역할과 위상을 두고 심하게 충돌하게 된 것이다. 정치교육에서 어떤 것을 다루고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두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독일 교육학자들은 작은 도시 보이텔스바흐에서 양쪽 입장을 절충하는 회의를 열어 크게 세 가지 합의사항을 만들었다.


1. 강압(교화)금지: 학생들에게 특정 견해를 주입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의견을 독립적으로 만들고 스스로 성숙할 수 있게 해야 한다.

2. 논쟁성 원칙: 학문과 정치의 논쟁점은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저마다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 관점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수업이 되어야 한다.

3. 행동지향: 학생들이 특정 정치 상황과 자기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은 두 번째 원칙이다. 정해진 입장을 전달하지 않고 다양한 입장을 보여주고 학생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 좌파든 우파든 특정 이념을 학생에게 주입하거나 교화하지 않는다는 것. 교사는 첫 번째 원칙처럼 특정 입장을 학생에게 주입해서는 안 되고 학생은 세 번째 원칙처럼 판단한 바를 갖고 스스로와 사회를 위해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학생이 수동적인 국민이 아니라 능동적인 시민 한 명으로 성숙할 수 있게 학교가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보이텔스바흐에서 독일의 교육 전문가들이 합의한 기본 정신이었다.


실제로 보이텔스바흐에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합의사항이나 완결된 학문적 결론을 정해서 발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교육에서 꼭 지켜야만 하는 최소한의 원칙을 논의했을 뿐이다. 다만 포괄적 수준에서 전체적 흐름만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합의 사항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합의’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교사는 완벽히 중립적이어야만 하는가?’, ‘어디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는가? 또는 어디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허용해야 하는가?’, ‘학생의 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가운데 어느 쪽 비중을 더 두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제기가 대표적이다. 글쓴이들이 이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한 구절을 몇 가지 소개한다.



보이텔스바흐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정치교육의 목적은 ‘정치적 판단 교육’이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려면 교사들 스스로 충분한 논거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판단을 공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 무엇보다 교사들은 정치적으로 사고하고, 참여하고, 투쟁하는 성인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은 대화, 책임 있는 실천, 그리고 현재 경험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잘 논의된 대안을 도출할 수 있다. p147.


즉, “어떤 방식으로든 보편성을 거부하는 문화 입장들, 예컨대 자기 세계관이 우월하다고 맹신해 다른 신념이나 문화 특징을 지닌 사람들을 순전히 그 신념이나 특징 때문에 탄압하거나 심지어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문화 입장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논쟁성의 경계는 “타자의 신념과 문화 특징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고 정당하다고 인정할 의지가 있는 그런 문화 입장들만을 교육 대상에서 정당한 것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p99.



한국의 시민 교육은 기형적이다. 헌법에 적힌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정치교육 금지’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시민을 기른다면서 정치적 쟁점을 다루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면서 그저 정치 제도의 파편만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실체를 감추어두고 그림자만 보게 하는 것이다.


학생이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려면 교실에서도 정치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라 교사가 교실에서 ‘정치’라는 단어를 꺼내는 일조차 금기시한다. 그저 시민교육에서 어떤 내용까지 가르치는 게 ‘위험하지 않은지’에 대해 소모적이고 낡은 논쟁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가르칠 내용이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규범을 합의하고 마련하려 한 독일의 사례를 소개하는 이 책이 반갑다.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를 두고 싸울 게 아니라 학생들이 ‘어떻게 배울 것인가’의 원칙을 먼저 이야기해보는 것. 그런 자리를 만들고 공론화해보는 것. 정답을 바로 정하기보다 의견 차이를 드러낼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을 먼저 만들어보는 것. 아직 민주주의를 꽃피워보지도 못했으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처방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이루어진 배경, 과정, 내용, 미래까지 무척 자세하고 충실하게 다루어놓았다. 읽는 내내 먼저 내 수업 시간에 ‘합의’의 발상을 어떻게 적용해볼까를 생각하느라 가슴이 뛰었다. 교사의 위상과 역할을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 시민 양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과 결론이 무척 와 닿는다.


다만, 독일과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교육의 발전 과정이 어땠는지 자세히 비교하는 글이 하나 들어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군대의 점호를 떠올리게 하는 아침 운동장 조회를 아직도 여러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계속하고 있는 한국이다. 이미 나치즘을 극복하면서 ‘정상을 지향’하던 독일의 20세기 후반과,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를 극복하지 못해 사회 전체와 학교마저 ‘비정상을 지향’하던 한국의 20세기 후반은 출발점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독일과 한국의 현대사를 구체적으로 비교해보고, 독일과 같은 ‘합의’와 ‘논의 과정’이 한국에서도 어떻게 해야 이뤄질 수 있을 것인지를 전망해보는 꼭지가 하나 들어간다면 좀 더 책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조금 위험한 책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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