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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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할 일이 많았다.


신기루 같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까워지는 것도, 둘도 없는 사이가 되는 것도, 그러다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어 제 갈 길을 가는 것도. 시간은 모든 걸 희미하게 흩어버린다.


시간은 지나가도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남는다. 사람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장 진하게 남길까? 나는 그게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 만들어져서 둘 사이에만 의미를 가졌던 행동들. 어쩌면 이별은 상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보다도 이제는 의미 없어진 습관을 혼자 끌어안고 버텨야 하는 시간 때문에 더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여전히 로비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전화가 걸려올 곳은 없었지만, 그것 말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텔레비전 야구 중계를 켜놓고 보는 척했다. 그리고 나와 텔레비전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공간을 응시했다. 나는 그 공간을 둘로 나누고, 나눠진 공간을 또 둘로 나눴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계속하다 마지막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정도로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p43. <반딧불이>



주인공은 꽤 오랫동안, 하지만 데면데면하게 알고 지냈던 어느 여자―먼저 죽어버린 친구의 애인이었던―와 갑자기 가까워진다. 같이 시간 보내고 같이 걸어 다니다가 어느 날은 하룻밤 자기도 한다. 주인공에게는 매주 토요일 밤마다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이별도 갑자기 찾아왔다. 그녀는 편지 한 통을 짧게 남기고 그의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남은 건 토요일 밤마다 전화를 기다리던 습관뿐.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의미가 없어져 버린 습관을 끌어안고 반복한다.



어디서 본 듯한, 아니 겪어본 것 같은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습관을 붙들고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지. 그렇게 옛 기억을 잠깐 꺼냈다가 바람결에 흘려보낸다. 이런 것도 소설의 미덕이라면 미덕이지 않을까?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하지만 그 무서운 걸 계속해서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사람이기도 하다. 그걸 만들고 나누며 좋아했던 그 순간은 진짜였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그런 시간도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소설 주인공도 반딧불이를 날려 보내놓고는 아마 다른 빛을 찾아 살아갔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이별의 그림자를 슥 그려냈다. 이 단편을 바탕으로 썼다는 《상실의 시대》에서는 이런 장면을 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단편 쪽이 좀 더 기억에 깊게 남을 것 같다. 물론, 단편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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