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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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48 2월 혁명 후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의 체코를 배경으로 한다. ‘승리에 찬 계급의 역사적 낙관주의라고 자랑스럽게 지칭되는 기쁨, 금욕적이고 장엄한 기쁨, 한마디로 환희에 찬 시대 분위기는 체제에 대한 비판은 커녕 가벼운 농담도 허용하지 않는 무거운 세계였다. 주인공 루드비크는 마르게타의 고지식하고 순진한 성격을 놀리고자 쓴 엽서 한장으로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그의 삶은 하루 아침에 몰락해 간다. 그는 처음에 공산주의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자신의 당원으로서의 자격에 일말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으나 어제의 동지였던 제네마크의 배신으로 당원 박탈은 물론 대학교에서도 축출되면서 극도의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당시 사물이나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적 관점이 팽배한 곳이 바로 대학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관용이란 사치는 베풀어 지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비크는 군대와 검은색 견장의 낙인 찍힌 탄광촌에서 격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있을 곳은 바로 대학교이며 당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정당성과 억울함을 당과 위원회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이는 그 당시 체코 사회에는 당에 죄를 지은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농민이나 노동자들 가운데서 일을 하면 용서을 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인 생각으로 2월 혁명 기간 동안 지식인들이 탄광으로, 공장과 같은 인민들의 공간속에서 일종의 정화를 거쳐 다시 자신들의 삶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는 시대적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사람들의 두 가지 헛된 믿음은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 잘못 등을 고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에서 후자에 속하는 헛된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탄광촌에서 그의 영혼을 구원해 준 존재는 루치에 이다. 항상 집단적으로 길들여지고 있던 그에게 개인적인 욕망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던 존재가 루치에 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치에는 그에게 끝까지 성적 욕망의 마지막 열쇠를 허용하지 않는 데 코스트카에 의해 나중에 밝혀 지듯이 루치에의 청소년 시절 집단 강간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녀로 하여금 루드비크와의 섹스를 거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개인적인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해 주었던 루치에와의 관계는 해프닝적인 섹스 스캔들로 끝맺게 되면서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기억에 대한 증오, 다시 말해 자신의 기억속 친구들에 대한 복수심뿐이다.

 

그는 제네마크의 아내 헬레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간통을 함으로써 자신의 20년 전 기억속의 제마네크에게 복수 한방을 먹이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제마네크와 그의 마지막 기억속에 화석화 된 제마네크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제네마크는 헬레나와는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할 뿐, 젊은 제자 브로조바양과 사랑을 나누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루드비크에게 패배감과 열등감을 줄 뿐이다.  

 

루드비크가 이 소설의 주인공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종교를 상징하는 코스트카와 민족을 상징하는 야로슬라프는 반드시 언급 할 가치가 있다. 우선 코스트카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정신적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회 평등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는 유신론적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루드비크가 믿음이 부족하여 과거 기억속의 증오와 복수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결국에는 루이치의 영혼을 신의 품안으로 인도하게 되지만 정작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살면서 루이치와의 사랑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나약한 인물이다.

 

야로슬라프 역시 기마행렬이는 민족적 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이를 아들에게 전수하려는 민족주의자 이지만 세상이 더 이상 역사적 전통이나 민속에는 관심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인물이다. 동시에 야로슬라프는 청년 시절 루드비크가 그토록 비난했던 광기로 물든 집단 의식에서 루드비크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주요한 인물이다. 저자는 야로슬라프를 통하여 루드비크 역시 젊은 시절 그가 혐오하는 가면 연극의 어린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인공 루드비크가 코스트카의 종교적 관용, 제네마크에 대한 복수심, 루이치와의 사랑, 그 어는 것에도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마지막에 그가 귀의하는 곳이 야로슬라프 악단과의 협주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전통을 이해 못하는 몽매한 젊은 청중들 앞에서 야로슬라프는 루드비크 옆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협주는 중단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나는 [농담]을 정치적인 소설로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하고 싶다.  

 

1950~60년대 체코는 공산주의의 역사적 시대 정신에 만취되어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에

인간의 존엄성은 체제 폭력에 파멸되어 가고 있었으나 개인을 구원하기에 종교는 위선적이고 민족(전통)은

노쇠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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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의 악몽이 끝났다.

 

이제 부터 밀란 쿤테라 [농담]을 필두로 나를 기다리는 소설이 10권이 넘는다.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읽다가 열이 받아서 - 물론 나한테 - 충동적으로 구매한 책 들이다. 한 동안은 사화과학 서적 근처에는 얼쩡도 되지 않을 것이

 

다. 하지만 대학 갈때 폼 난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사회학"을 전공 한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이름만 들어도 뿌듯한 (뭐 그런 이

 

름들 있지 않나? 푸코, 들뢰즈, 데리다, 기든스, 한나 아렌트, 아도르노, 비트겐슈타인, 니체 뭐 이런 현학적인 ㅋㅋ) 저자들의

 

유혹을 쉽게 뿌리 칠 수도 없고 내 허영심을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단, 당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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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300페이지까지 기를 쓰고 읽었다. 하지만 아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 제일 황당한 느낌이 드냐 하면 A장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리 속이 멍한 상태인데 B장에서 이 부분은 A장에서 충분히 설명했다는 식의 문장을 맞닥뜨렸을 때이다그래도 아무 소득도 없었던 건 아니다. 다행히고 다음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진단은 1940년대라는 시차가 느껴지질 않을 정도로 현재성이 돋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신은 일상화 되어 가고 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의 동력이었던 개인의 상업적 모험의 로맨스는 전문가 집단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업무로 대체되면서 개인의 개성과 의지력은 상실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경제 진보는 비인격화되고 자동화 되는 경향이 있다. 계산, 예측 가능한 결과는 비전을 말살한다.

 

이런 행운이 앞으로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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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한길그레이트북스 116
조지프 슘페터 지음, 변상진 옮김 / 한길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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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큰 맘 먹고 도전 한 책인데 처음부터 삐거덕 거린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한번에 리뷰 올리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 매일 조금씩 하려고 한다. 우선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항상 핑계 거리로 찾게 되는 단골 메뉴이긴 한데 이 번 역시 '번역' 의 장벽에서 헤메고 있다. 우선 내 지적 자존심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 책 다 읽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번역자 분이나 교정 보신 분들은 오해 없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첫째, 전자, 후자라는 단어의 남발은 좀 문제가 있다. 이런 단어는 대학생들의 원서 번역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다.

둘째, 번역 문장이 너무 길다. 한 문장을 필요할 경우 2-3문장으로 나누어 번역 했다면 더 쉽지 않았을까? 주어와 서술어의 간격이 길어지면 문장이 산으로 간다.

셋째, '이것이' '' '이러한' '"와 같은 영어 대명사를 직역한 듯한 문장 또한 눈에 거슬린다. 새로운 가격이라고 해도 될 것을 꼭 '' 새로운 가격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수동문 서술어를 남발하는 것 역시 영어 수동문 직역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늘까지 간신히 250페이지 정도를 읽었는데 두서없이 남 탓하는 푸념을 늘어 놓으니 앞으로 다시 250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오늘까지 별점은 일단 둘이다…

 

드디어 오늘 3/12일 책을 다 읽었다. 역시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만 16 (P325) 부터는 번역이 큰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슘페터가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통해서 과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주에 대해서 무엇을 예기하고 싶었는지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 그저 슘페터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과학자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견해를 배제한 채,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내부적인 경제적 모순에 의해서가 아닌 발전에 의해 사회주의로 이행 되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충분히 공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이 책의 주제가 아닌가 희미하게나마 추측할 뿐이다. 사실 이 정도의 주장이라면 사회주의에 대해 최소한 공감 내지 비판적 지지라도 보여 줄 만도 한데, 저자인 슘페터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이 책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철저하게 숨긴다. 또한 슘페터는 폭력이나 혁명이 아닌 의회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유럽식 사회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Right) 체제로 설명하는 가 싶더니 갑자기 어는 순간에는 중앙 집권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길을 읽었고 전체적인 논리의 연결고리가 내 머리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럽과 미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체를 다루는 5부가 개인적으로 이 책의 최고 장임에도 불구하고 앞의 이론적 분석들과 연결성 및 개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슘페터의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은 1940년대라는 시차가 느껴지질 않을 정도로 현재성이 돋보인다. “사회에서 혁신은 일상화 되어 가고 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의 동력이었던 개인의 상업적 모험의 로맨스는 전문가 집단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업무로 대체되면서 개인의 개성과 의지력은 상실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경제 진보는 비인격화되고 자동화 되는 경향이 있다. 계산, 예측 가능한 결과는 비전을 말살한다.

 

또한 다음의 슘페터의 민주주의 성공 조건은 지금의 시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정치인이 적절한 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정치인들은 충분히 높은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바이마르 공화국 (1918~33) 당시 정치인들은 보통 수준이었으나 그것이 결국은 반민주주의 지도차 (아마도 히틀러)에게 치명적 패배를 당하는 빌미를 제공 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정치 행위의 범위는 무한하지 않다. 정치 행위, 특히 국가 통치 행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전문가 집단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관료 조직이다.

셋째, 민주주의 정부는 잘 훈련된 관료 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관료는 정부의 수장인 정치인을 지고하고 필요할 경우 지시할 정도로 강력해야 한다. 관료는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넷째, “민주주의적 자제” 무엇보다 선거인과 의원들은 충분히 높은 지적, 도덕적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일단 의원들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의사 활동을 하며 선거인 역시 선거 이후에는 정치 활동은 의원의 직무이고 자신들의 직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슘페터 하면 떠오르는 “혁신”, “창조적 파괴”와 같은 단어는 결코 이 책의 핵심 내용이 아니며 이는 보수주의자들이 슘페터를 자본주의의의 옹호자로 편향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 물론 슘페터가 보수주의자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자본주의의나 사회주의 어느 편도 아님을 병적으로 집착하는 슘페터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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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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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꼭 읽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니체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기 전에 워밍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먼저 선택하였다. 책을 고름에 있어 출판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그 이유는 출판사의 도서 목록을 보게 되면 책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린비는 내가 요즘 주목하고 있는 출판사이고 훌륭한 출판 라인업을 보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학 초보자인 나를 니체에게 안전(?)하게 다다르게 해 주는 안내자 역할을 해 줄 거라고 믿었다.

 

우선 이 책을 통해서 니체의 사상이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 윤리, 특히 종교로 상징화 된 무거움 대한 거부감, 긍정의 힘을 믿는 가벼움, 목적론적 존재와 보편적 이성에 대한 냉소와 염증으로 대표되는 니체 철학을 보건 대 만약 니체가 직접 소설을 썼다면 밀란 쿤테라의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목적론적 세게관을 거부하고 인생을 하나의 주사위 놀이에 비유하는 차라투스트라는 토마시의 고대 현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의 망상이며 무리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주사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행위이지만 그 결과는 항상 차이가 있다. 위로 던져진 주사위와 내려 오는 주사위는 같은 존재이지만 땅에 내려오는 순간은 항상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토마시가 빠지는 연애 행각은 주사위 놀이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행위의 반복이지만 쉽게 싫증이 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은 이미 죽었지만 인간들이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이나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과 같은 위선자들에게 저당 잡힌 삶을 살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를 알리고자 세상으로 나온 현인이자 예언자이다. ‘이 위험하고 불필요한 존재인 이유는 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저 세상으로 이 세상을 폄하하고 모욕함으로써 인간을 이유 없는 죄의식에 빠지게 하여 나약한 존재로 타락시킨 주범이기 때문이다. ‘저 세상은 오로지 이 세상을 비판하고 폄하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하며 끊임 없이 가치 창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이란 종교적 유일신을 지칭하는 협소한 의미를 초월해 모든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메타포로서 광역적인 의미까지 나아간다. 그러므로 니체는 모든 철학자들과 일반인들이 보편적 진리라고 믿는 영혼의 순수함’, ‘노동의 즐거움’, ‘자아의 존재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비판의 칼을 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아는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자아는 자기의 행동과 실천이 있은 후 형성 된 자기에 대한 어떤 관념일 뿐이다라고 기존의 자아개념에 전복을 시도한다. 다음 장 노동에 대해서도 ‘‘ ‘생산한 가치를 빼앗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가 아닌 타인의 가치를 생산 했다는 점이다라고 공산주의의 노동 가치설과는 다른 관점에서 노동을 비판한다. 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가치 창조만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은 전쟁에 다름 아니다. 이 부분에서 혁명가나 독재자들이 니체를 사랑했던 이유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니체 코스의 다음 요리는 국가이다. “국가는 마치 그 누구로부터 불편부당한 존재인 양, 그 스스로가 보편적인 선이고 정의인 양 행세한다. 실제로는 특정한 계층, 특정한 계급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혹은 그 스스로가 특정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회로부터 초연한 양 거드름을 피운다국가도 역시 ’ = 초월적인 존재의 같은 모습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초월적인 존재의 출현을 막기 위해 인간에게 전쟁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편이 압도적으로 다른 편보다 우위에 있어 파괴 행위를 일삼는 것은 참된 전쟁이 아니다. 니체는 선동한다. “새로운 우상이 출현했다면 곧바로 전쟁을 벌여라

 

여성에 대한 부분은 좀 억지 해석인 것 같다. 어떻게 해석 하든 니체가 여자를 2등 인간으로 본 것은 확실 한 것 같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니체의 분석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본에서 직접 확인 하는 것으로 잠시 유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위버멘쉬’ (초인), 니체의 트레이드 마크를 드디어 만날 순간이다. 신의 죽음 후에 위버멘쉬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위버멘쉬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며 인간적인 것들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의지라 함은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의 힘을 의미하며 인간은 끊임없이 의지하고, 평가하고, 창조하는 일이다.

 

더 자세한 니체의 세계는 원본에서 날 것으로만나야 할 것 같다. ‘영원회귀’, ‘권력의지’, ‘위버멘쉬’, 와 같은 개념도 완전히 이해 되지 않는다. 누가 먹여 주는 음식이 편하기는 하지만 소화는 잘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니체의 사상 세계로 초대해준 첫 책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앞으로 어떤 번역서를 고를지가 또 다른 고민이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악의 없는 허영심으로 나만의 소박한 사치를 부려보고 싶다.

 

P.S.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내 앞에 버티고 있으니 차라투스트라와의 만남은 좀 시간이 걸릴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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